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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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에 대하여 / 정호승

그림/ 박인호 ​ ​ ​ ​ ​ 실패에 대하여 / 정호승​ ​ ​ 실패는 나의 애인이다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애인이다 나는 애인의 손을 잡지 않으려고 맨발로 도망쳐 왔으나 결국 애인의 손에 목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 나는 전생에서도 실패했다 전생했어도 인간으로 태어나 불행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일에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 실패한테 무릎을 꿇고 울었다 ​ 실패한 뒤에는 꼭 비가 온다 우산을 펼치면 우산살 또한 부러져 있다 실패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실패했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당신의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 실패에 부고장은 오지 않는다 신문 부고란에 실패의 별세 소식은 없다 실패는 이제 나의 나다 사랑하지 않는 애인도 애인이다 실패한 사랑도 사랑이다 ​ ​ ​ ​ ​ 정호승 시집 / 슬픔이 택..

라라를 위하여 / 이성복

그림 / 최금란 라라를 위하여 / 이성복 지금, 나뭇잎 하나 반쯤 뒤집어지다 바로 눕는 지금에서 언젠가로 돌아누우며 지금, 물이었던 피가 물로 돌아가길 기다리는 지금 내게로 들어와 나를 벗으며 지금, 나 몰래 내 손톱을 밀고 있는 그대 손톱 끝에서 밀리는 공기의 저쪽 끝에서도 밀리는 그대, 내 목마름이거나 서글픔 가늘게 오르다가 얇게 깔리며 무섭게 타오르는 그대 나는 듣는다, 그대 벗은 어깨를 타고 흘러 떨어지는 빛다발에 환호歡呼 잔뜩 물오른 그대의 속삭임 어디서 그대는 아름다운 깃털을 얻어 오는가 초록을 생각하면 초록이 몸에 감기는가 분홍을 생각하면 분홍이 몸에 감기는가 무엇이 그대 모가지를 감싸 안으며 멋진 마후라가 되는가 날 때부터 이쁜 마음을 몸에두른 그대는 행복하여라 행복한 부리로 아스팔트를 쪼..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 베르톨트 브레히트

그림 / 이종석 ​ ​ ​ ​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 베르톨트 브레히트​ ​ ​ ​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 그 후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마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었기에 ​ ​ ​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연인에게 쓴 편지 ​ ​ ​ ​ 나태주 시집 / 처음 사는 인생, 누구나 서툴지 ​ ​ ​ ​ ​ ​

​잠수 潛水 / 이어령

그림 / 다비드자맹 ​ ​ ​ ​ ​ ​ 잠수 潛水 / 이어령​ ​ ​ 사랑은 관찰이 아니다 잠수다 강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뛰어든다 ​ 차갑고 깊은 냇물 바닥으로 잠수한다 ​ 아가미처럼 겨드랑이 사이로 물방울을 느끼며 호흡한다 백수광부白首狂夫처럼 잡아도 돌아다보지 않고 허파에 물이 차도 결코 죽은 물고기처럼 물 위에 떠서 내려가지 않는다 ​ 떠내려가지 않는다 강물에 어둠이 깔려도 별들처럼 물위의 붙박이일 망정 떠내려가지 않는다 ​ 사랑은 관찰이 아니다 잠수다 수초도 자라지 않는 바닥 밑으로 잠수복도 없이 그냥 가라앉는것 사랑은 관찰이 아니다 잠수다 모래 속에 사랑하는 마음 속에 그냥 숨는 모래무지다 ​ ​ ​ ​ 이어령 시집 /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 ​ ​ ​ ​ 백수광부..

황혼 / 이육사

그림 / 손기옥 황혼 / 이육사 내 골방에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드리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 십이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 속 그윽한 수녀 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많은 수인들에게도 의지할 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대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히 사라져..

수직의 무게 / 이 효

진도 수직의 무게 / 이 효 도시의 실핏줄 터트리고 달려온 남해 품을 내어준다 모래사장에 벗어 놓은 신발은 하루 끈을 느슨하게 푼다 한평생 리모컨이 되어 가족이 누른 수직의 무게로 인생의 물음표와 마침표를 견뎌야 했던 남자 치매 걸린 노모의 수다는 푸른 바다를 붉게 물들인다 껍질 벗겨진 전선줄 천둥소리에 뼈대 하나 남긴다 코드가 헐거워진 저녁 남자 닮은 노을 하나 혼신을 기울여 통증의 언어를 잠재운다

천일염 / 조석구

그림 / 김기정 천일염 / 조석구 염전은 바닷물을 퍼 담아 햇볕에 말린다 물은 증발하여 승천하는데 소금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소금은 슬프다 소금꽃 눈물꽃 소금은 바닷물의 뼈 소금은 바닷물의 사리(舍利) 소금은 바다의 흉터로 남아 지상의 거룩한 양식이 된다 *1940년 오산시 가장동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때어남 *고려대학교 국문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석사과정 *세종대학교 박사과정 *시집 "닿을 올리는 그대여" "우울한 상징" "시여, 마차를 타자" "바이올린 마을" "붉은 수레바퀴" "오래된 뿔" "오산인터체인지" "뿌리깊은 강" "끝없는 아리아" "석중화 농담" "거리의 성당" 출간

비망록 / 문정희

그림 / 유진선 ​ ​ ​ ​ ​ ​ 비망록 / 문정희​ ​ ​ ​ ​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 ​ ​ ​ ​ 이 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화자는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지만 결국은 자신을 더욱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에 대한 반성을 갖고 있으면서 사랑하는 사람은 늘 옆에서 별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존재지만 ..

사진관 앞, 텅 빈 액자 / 이 효

그림 / 윤영선 ​ ​ ​ ​ ​ 사진관 앞, 텅 빈 액자 / 이 효​ ​ ​ ​ ​ 사진관에 붉은 벽돌은 네모난 관절 소리를 낸다 액자 속 나비넥타이와 검정 구두 신은 사내아이 어디로 간 것일까 ​ 어릴 적 사진 속 소년 그녀의 볼에 복숭아꽃 핀다 세월이 바람처럼 흘러가고 그 많던 사진 속 가족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 사라진 시계 속 여자의 초침은 유년의 퍼즐을 하나 둘 맞춘다 ​ 텅 빈 액자 속 걸어 나간 사람들 골목길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 ​ ​ ​ ​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 ​ ​ ​ ​ ​ ​ ​

전화 / 최금진

그림 / 이기전 ​ ​ ​ ​ ​ 전화 / 최금진​ ​ ​ ​ 탯줄을 자르고 어른이 된 후 플러그 빠진 콘센트처럼 허전한 배꼽에 애인의 배꼽도 대어보고 실연의 칼끝도 대어보았지만 전화기만큼 딱 맞는 건 찿지 못했다 ​ 꼬불꼬불한 탯줄을 달고 인큐베이터 같은 박스 안에서 잠들어 있던 전화기를 꺼내며 두근거리던 그때 따르릉, 첫울음과 함께 빈방에 가득 울리던 세상과의 연결음들을 한밤에도 얼마나 기다렸는지 ​ 사람들과 연결, 연결되며 느끼는 아흐, 세상은 양수같이 가슴 출렁이는 곳 무참히 깨진 기억들보다 더 많은 번호들이 손에 있는 한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 낙태되지 않는다는 것 ​ 오늘밤에도 오지 않는 전화를 공복의 허전한 배 위에 올려놓고 잠을 청한다 ​ ​ ​ ​ ​ ​ ​​ ​ ​ ​ ​ ​ ​ 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