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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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플라워 / 이 효

드라이플라워 / 이 효 내가 붉은 것은 당신을 부르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가시가 있는 것은 나를 건들지 말라는 까닭입니다 언젠가는 타오르던 그 사랑도 시들겠지만 당신이 떠나면 슬픔 속 나는 마른 가시가 됩니다 사랑이 떠나도 견디게 하는 것은 향기가 남아서겠지요 오늘, 슬픔을 곱게 말립니다 오! 장미여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내려 놓는다 / 이영광

내려 놓는다 / 이영광 역도 선수는 든다 비장하고 괴로운 얼굴로 숨을 끊고일단은 들어야 하지만 불끈 들어올린 다음 부들부들 부동자세로 버티는 건 선수에게도 힘든 일이지만 희한하게 힘이 남아돌아도 절대로 더 버티는 법이 없다 모든 역도 선수들은 현명하다내려놓는다 제 몸의 몇배나 되는 무게를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텅! 그것 참 후련하게 잘 내려놓는다 저렇게 환한 얼굴로이영광 시인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1998년 신인문학상 "빙의" 당선2003년 첫 시집

베이비박스 / 이효

​베이비박스 창고 바닥에 죽어있는 새 한 마리 출산 기록은 숲에 있지만 출생 신고는 나무에 없다 유령이 된 새, 텅 빈 베이비박스 창문 밖의 모진 말들은 쪼글거린다 비를 맞고 날개를 접었나 봐, 굶어 죽은 거야 죽은 아기새 주위로 작은 벌레들이 조문을 온다 작은 종이 상자에 넣어 묻어 주려고 새의 날개를 드는 순간 구더기가 바글거린다 여린 살을 파고드는 고통, 어제와 오늘이 뜯겼다 외면과 무관심의 순간, 살점은 제물이 된 거야 다시는 푸른 숲으로 돌아갈 수 없는 죽음에 이르러 알게 된 세상 불온한 도시에서 불온한 사랑이 미등록된 출생신고 죄책감마저도 씹어 먹은 도시의 슬픔들 말문을 닫은 모진 에미를 대신해 7월의 하늘은 수문을 연다 이효 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소싸움 / 황인동

소싸움 / 황인동자 봐라!수놈이면 뭐니뭐니 해도 힘인기라돈이니 명예이니 해도 힘이 제일인기라허벅지에 불끈거리는 힘 좀 봐라뿔따구에 확 치솟는 수놈의 힘 좀 봐라소싸움은 잔머리 대결이 아니라오래 되새김질한 질긴 힘인기라봐라, 저 싸움에 도취되어 출렁이는 파도를!저 싸움 어디에 비겁함이 묻었느냐저 싸움 어디에 학연지연이 있느냐뿔따구가 확 치솟을 땐나도 불의와 한 판 붙고 싶다.

6월의 혈관 / 이 효

6월의 혈관 / 이 효​​​​가시 돋은 피가 온몸을 할퀴며 간다 몸은 거대한 산맥 장기들 깊숙이 흐르는 진한 사색은 한평생 그가 살아온 길을 흑장미로 출력한다 주삿바늘은 부질없는 것들을 기억하고돌아누운 벽은 무채색 숨소리로 흐느낀다 명함 하나 없는 삶도주머니가 깊지 못한 삶도 끈질기고 싶은 순간이다 혈관을 타고 도는 과거의 연민은 피의 가시에 수없이 찔린다 새벽마다 짐승의 힘으로 뿔로 세상을 밀고 달린 남자 하루를 중얼거린 무너진 산은 급한 내일을 수혈받는다 먼 산, 6월의 혈관은 시퍼런 울음 누른다 ​​​이효 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네 이름은 아직 붉다

강진고을 (강진 신문) 네 이름은 아직 붉다 / 이 효 동백, 그 이름으로 붉게 피는 말숨결이 꽃잎 같은 집뒤뜰엔 백 년 묵은 동백나무 붉은 침묵으로 피었다 짧고도 깊은숨,모두를 품고 떨어지는 꽃그날 너를 위해 목을 매었던 순간도내겐 시 한 줄 강진의 바람이 불 때마다나의 입술을 조용히 불러다오사랑이었다고 그것이 조국이었다고 붉게 피는 말들은 쓰러지지 않는 붉은 네 이름

벚꽃 2 / 이효

벚꽃 2 / 이효 ​봄의 폭설을 보아라 아름답다는 말을 차마 뱉지 못하고 내 입술이 벌어져 꽃이 되었다 그냥 울어 버릴까하얗게 뿌려놓은 웃음인지 울음인지 꿈속을 거닐 듯 내 앞에 펼쳐진 그리움의 연서를소리 없이 읽는다 바람에 꽃잎 하나 날아와내 입술에 짧은 키스 남기고 떠나면시간은 영원한 봄날이 된다 ​​​​​이효 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