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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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 기형도

그림 / 안려원 10월 /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끔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

문학이야기/명시 2022.10.23 (17)

꽃밭을 바라보는 일 / 장석남

그림 / 백기륜 꽃밭을 바라보는 일 / 장석남 저 꽃밭에 스미는 바람으로 서걱이는 그늘로 편지글을 적었으면 함부로 멀리 가는 사랑을 했으면 그 바람으로 나는 레이스 달린 꿈도 꿀 수 있었으면 꽃속에 머무는 햇빛들로 가슴을 빚었으면 사랑의 밭은 처마를 이었으면 꽃의 향기랑은 몸을 섞으면서 그래 아직은 몸보단 영혼이 승한 나비였으면 내가 내 숨을 가만히 느껴 들으며 꽃밭을 바라보고 있는 일은 몸에,도망온 별 몇을 꼭 나처럼 가여워해 이내 숨겨주는 일같네 장석남 시집 / 꽃밭을 바라보는 일

문학이야기/명시 2022.10.21 (12)

호수 / 이형기

그림 / 신종식 호수 / 이형기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 지는 이 호숫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같이 떨던 것이 이렇게 고요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다 시집 / 적막강산

문학이야기/명시 2022.10.14 (45)

수상한 인사 / 박소란

그림 / 금채민 수상한 인사 / 박소란 안녕 반갑게 인사합니다 알아보지 못하시는군요 악수 대신 결투를 청한 걸까 보자기 대신 주먹을 내밀고 만 걸까 머쓱한 마음에 뒷머리만 긁적이다 돌아섭니다 바보처럼 도처에 흘러넘치는 안녕 안녕 눈부신 인사들 평화의 감탄사들, 가까이 할 수 없는 저 수많은 인사는 누구의 것입니까 누구를 위한 성찬입니까 그대 나는 인사가 없습니다 그대에게 줄 인사가 없습니다 박소란 시집 / 심장에 가까운 말

문학이야기/명시 2022.10.13 (19)

걸레의 마음 / 정호승

그림 / 장근헌 걸레의 마음 / 정호승 내가 입다 버린 티셔츠를 어머니는 버리기 아깝다고 다시 주워 걸레로 쓰신다 나는 걸레가 되어 집 안 청소를 하고 변기도 닦고 침대 모서리 먼지도 닦아낸다 어떤 날은 베란다에 떨어진 새똥도 닦아낸다 그렇게 걸레가 되고 나서부터는 누가 나더러 걸레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도 화를 내지 않는다 더러운 곳을 깨끗하게 청소할 때마다 나를 걸레로 만드신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나는 다 해진 걸레로서 열심히 살아가면서 평생 나를 위해 사셨던 어머니의 걸레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 정호승 시집 / 슬픔이 택배로 왔다

문학이야기/명시 2022.10.12 (23)

마크 로스코와 나 2 / 한강

작품 / 전지연 마크 로스코와 나 2 / 한강 한 사람의 영혼을 갈아서 안을 보여준다면 이런 것이겠지 그래서 피 냄새가 나는 것이다 붓 대신 스펀지를 발라 영원히 번져가는 물감 속에서 고요히 붉은 영혼의 피 냄새 이렇게 멎는다 기억이 예감이 나침반이 내가 나라는 것도 스며오는 것 번져오는 것 만져지는 물결처럼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의 피 어둠과 빛 사이 어떤 소리도 광선도 닿지 않는 심해의 밤 천년 전에 폭발한 성운 곁의 오랜 저녁 스며오르는 것 번져오르는 것 피투성이 밤을 머금고도 떠오르는 것 방금 벼락치는 구름도 통과한 새처럼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 영혼의 피 *한강 시집 /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이야기/명시 2022.10.11 (24)

가슴이 슬프다 / 정호승

그림 / 금채민 가슴이 슬프다 / 정호승 어린 새들이 단 한알의 모이를 쪼아 먹으려고 사방을 두리번 두리번거리고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재빨리 수십번이나 자리를 옮기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기어이 한알의 모이도 한모금의 물도 쪼아 먹지 못하고 검은 마스크를 쓴 인간이 두려워 포르르 어둠이 깃드는 저녁 하늘로 멀리 날아갈 때 가슴이 슬프다 정호승 시집 / 슬픔이 택배로 왔다

문학이야기/명시 2022.10.10 (25)

새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 정호승

그림 / 안려원 새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 정호승 새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인간이 쏜 총에 맞아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높은 가지 끝에 앉아 지상에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의 새가 흘리는 것은 오직 이슬일 뿐 이슬의 날개일 뿐 이슬의 날개로 새벽 높이 날아가 먼동이 트는 새벽하늘이 될 뿐 새는 인간의 길에 눈물을 떨어뜨려 인간을 슬프게 하지 않는다. 정호승 시집 / 슬픔이 택배로 왔다

문학이야기/명시 2022.10.09 (22)

안부 / 나호열

그림 / 전계향 안부 / 나호열 안부를 기다린 사람이 있다 안부는 별일 없냐고 아픈 데는 없냐고 묻는 일 안부는 잘 있다고 이러저러하다고 알려주는 일 산 사람이 산 사람에게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고백하는 일 안부를 기다리는 사람과 안부를 묻는 사람의 거리는 여기서 안드로메다까지 만큼 멀고 지금 심장의 박동이 들릴 만큼 가깝다 꽃이 졌다는 슬픔 전언은 삼키고 꽃이 피고 있다는 기쁨을 한아름 전하는 것이라고 안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날마다 마주하는 침묵이라고 안부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안부는 낮이나 밤이나 바가 오나 눈이 오나 가리지 않고 험한 길 만 리 길도 단걸음에 달려오는 작은 손짓이다 어두울수록 밝게 빛나는 개밥바라기별과 같은 것이다 평생 동안 깨닫지 못한 말뜻..

문학이야기/명시 2022.10.0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