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분류 전체보기 1634

허물 가진 것이 나는 좋다 / 이병일

​ 허물 가진 것이 나는 좋다 / 이병일 ​ ​ ​ ​ 우리는 허물 가진 것들을 보면 참, 독해 끔찍해 무서워 사막에 그슬린 돌덩이 같은 말을 한다 나는 허물 가진 것이 좋다 허물을 먹지 않고 사는 목숨은 없다 가재, 뱀, 누에, 매미 벗는 몸을 갖기 위해 끈끈한 허물을 가진다 숨을 갖기 위해 벗는다 몸이 출렁거리지 않도록 정말이지, 절망도 가둘 몸집을 가졌구나 허물 벗는데 여생을 모두 썼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벗어도 벗겨내도 벗지 못한 허물이 있듯 히말라야 어느 고승은 정신이 허물이라고 했다 아하, 그렇다면 죽음도 허물이다 반 고흐, 칭기즈칸, 도스토예프스키 비석 뒤의 이야기로 반짝인다 한낱 이야기 앞에서 내가 공하게 믿어온 것들이 깨진다 다음이라는 것이 없는 몸들, 허물만 믿는다 ​ 계간 202..

죽순 / 이병일

© diamondshot, 출처 Unsplash 죽순 / 이병일 수상하다, 습한 바람이 부는 저 대밭의 항문 대롱이 길고 굵은 놈일수록 순을 크게 뽑아 올린다 깊숙이 박혀있던 뿌리들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푸른 힘을 밀어내고 있다 댓잎이 쌓여있는 아랫도리마다 축축이 젖어 뾰죽 튀어나온 수만의 촉이 가볍게 머리 내밀고 뿌리는 스위치를 올릴 것이다 난, 어디로부터 나온 몸일까? 대나무 숲, 황소자리에서 쌍둥이자리로 넘어가는 초여름이다 땅속에서는 어둠 을 틈타 안테나를 내밀 것이다 난 초록의 빛을 품고 달빛 고운 하늘에 뛰어오를 것이다 대나무 줄기가 서로 부딪쳐 원시의 소리를 내는 아침, 날이 더워질수록 물빛 속살을 적시며 얕은 잠을 자고 있었던가 초승달이 보름달을 향해 갈수록, 난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하늘..

누군가 곁에서 자꾸 질문을 던진다 / 김소연

그림 / 김현숙 누군가 곁에서 자꾸 질문을 던진다 / 김소연 살구나무 아래 농익은 살구가 떨어져 뒹굴듯이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너무 많은 질문들이 도착해 있다 다른 꽃이 피었던 자리에서 피는 꽃 다른 사람이 죽었던 자리에서 사는 한가족 몇 사람을 더 견디려고 몇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우리 같은 사람을 나누어 가진 적이 있다 같은 슬픔을 자주 그리워한다 내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마다 나를 당신이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 지난 여인들이 자꾸 나타나 자기 이야기를 겹쳐 쓰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같은 사람이 되어 간다 당신은 알라의 얼굴에서 예수의 표정이 묻어나는 걸 보았다고 했다 내 걸음걸이에서 이제는 당신이 묻어 나오는 걸 아느냐고 당신에게 물어보았다 우리는 두 개의 바다가 만나는 해안에 도착했다 늙..

아내 / 이경렬

그림 / 민경수 ​ ​ ​ ​ 아내 / 이경렬​ ​ ​ ​ ​ 곤하게 잠든 밤에도 꿈속에서조차 못 이기는 아픔 신음 소리에 몸을 뒤척인다 움직이는 종합병원이 된 지 오래된 몸 대장을 잘라낸 남편의 세끼 맞추기에 쉴 틈이 없다 "여보 설거지는 내가 하지" 집사람 물리고 그릇을 닦는데 누가 뒤에서 한마디 하는 것 같았다 "이놈아 진작 좀 그렇게 하지" 암 수술 받은 어느 남자가 그랬단다 천사와 함께 살면서도 이제껏 몰랐다고 그 사람도 나같이 멍청했나 보다 방에서 집사람 신음 소리가 또 들린다 저 소리가 이제야 아프게 들이다니 누군가 또 한 마디 한다 "이 사람아 지금도 늦지 않았네" ​ ​ ​ ​ ​ ​ 시집 / 인사동 시인들(2023) ​ ​ ​ ​ ​ ​ ​

진흙을 빠져나오는 진흙처럼 / 오정국

진흙을 빠져나오는 진흙처럼 / 오정국 매미가 허물을 벗는, 점액질의 시간을 빠져나오는, 서서히 몸 하나를 버리고, 몸 하나를 얻는, 살갖이 찢어지고 벗겨지는 순간, 그 날개에 번갯불의 섬광이 새겨지고, 개망초의 꽃무늬가 내려앉고, 생살 긁히듯 뜯기듯, 끈끈하고 미끄럽게, 몸이 몸을 뚫고 나와, 몸 하나를 지우고 몸 하나를 살려 내는, 발소리도 죽이고 숨소리도 죽이는, 여기에 고요히 내 숨결을 얹어 보는, 난생처음 두 눈 뜨고, 진흙을 빠져나오는 진흙처럼 ​ ​ 오정국 시집 / 파묻힌 얼굴 2011

현대시 / 김산​​

그림 / 후후 ​ ​ ​ ​ ​ 현대시 / 김산​ ​ ​ ​ 무언가 저쪽에서 오고 있었다 공기는 잠시 가던 길을 멈췄고 인파 속에서 고갤 갸웃거렸다 그는 불행히 발견되지 않았다 고로, 어떤 발생도 하지 않았다 모든 빛은 그늘이 남긴 배경이므로, 명백한 저녁을 그린 화가는 없다 실패한 비닐 창문의 구도 사이로 바람의 궁극을 윤문하는 한 마리 새 날개는 결국 장식적이고 현학적이다 그는 쓸데없는 안부를 생략한다 공장 굴뚝은 비약하는 고체의 빗줄기 안개의 기록은 이제 그만하기로 한다 울지도 웃지도 않는 이 세계에서 어떤 그림은 도저한 패국을 완성한다 우체국 직원은 더 이상 슬프지 않다 퇴근 무렵의 종이박스는 딱딱한 표정이다 몰락을 그리는 화가는 흔해빠졌다 ​ ​ ​ ​ ​ 웹진 2015년 9월호 ​ ​ ​ ​ ..

감나무 / 이재무

그림 / 유영을 ​ ​ ​ ​ ​ ​ 감나무 / 이재무 ​ ​ ​ 감나무 저는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 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 놓고 주인은 삼십 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 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워 보는 것이다 ​ ​ ​ ​ ​ *시집 : 청소년, 시와 대화하다 ​ ​ ​ ​ ​ ​ ​ ​

지상의 방 한 칸 / 김사인

그림 / 홍종구 지상의 방 한 칸 / 김사인 세월은 또 한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 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 비는 재주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이 초란한 몸 가릴 방 한 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인가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 본다 밖에는 바람 소리 사정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시집 / 청소년, 시와 대화하다

마음 / 김광섭

그림 / 김정수 마음 / 김광섭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시집 /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명시 100선

환절기 / 조은영

그림 / 이종석 ​ ​ ​ ​ 환절기 / 조은영 ​ ​ ​ 잠들지 못한 사람들이 수화기를 쥐고 있다 너는 물이 많은 사주를 가졌구나 발이 땅에 닿지 않아 뿌리째 연결음에 매달린 사람들 생활의 자전 속에 자꾸 넘어지는 마음 밤이 등을 돌려 울고 있는 달을 안고 있다 ​ 주먹을 쥐고 울어도 손아귀는 힘이 없어 마르지 않는 바닥에서 미끄러지는 나날 ​ 축축한 손의 질기로 흙을 빚는다 눈물을 담을 수 있는 잔만큼 손끝으로 넓이와 깊이를 만든다 물레의 방향에 끌려가지 않도록 지탱하는 왼손 오른 손가락 끝에 힘을 모은다 ​ 물레가 돈다 원심력을 손끝으로 끌어 올린다 절정에 다다른 기물 자름실은 물레의 반대 방향으로 지나간다 질기가 만든 잔을 가마에 넣는다 ​ 손끝에 힘을 준다 원을 그리며 춤을 춰야지 방향을 바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