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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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공부 / 박수진

그림 / Ellie's ​ ​ ​ ​ ​ ​ 한글 공부 / 박수진 ​ ​ ​ ​ 국가 유공자 자녀였다 한글을 가르쳐도 금방 잊어버리는 학생 학생 이름 한 자 한 자 조합해서 글자가 된다는 걸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어느날 출근을 해보니 시멘트 벽돌인 학교 담장으로 죄다 내 이름을 적어 놓았다 화분이란 화분에도 모두 내 이름이었다 나의 유명세는 그때가 최고였다 학교 통째로 내 것이 될 뻔 했다 ​ ​ ​ ​ ​ 박수진 시집 /산굼부리에서 사랑을 읽다 (특수학교 교사의 일기) ​ ​ ​ ​ ​ ​

소주병 / 공광규

​ ​ ​ ​ ​ 소주병 / 공광규 ​ ​ ​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 빈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 다닌다 ​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 ​ ​ ​ ​ *공광규 시인은 빈 소주병을 바라보면서 늙어서 소외된 아버지 즉 젊은 날 삶에 찌들어서 노동이 끝난 후에 소주병을 기울였을 그러나 이제는 퇴물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쓸쓸하게 생각하면서 아버지와 빈 소주병을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특징을 잘 살려서 만인에게 사랑받는 소주병이란 명시를 탄생시켰다. ​ ​ ​ ​

양철 지붕과 봄비 / 오규원

그림 / 최선옥 ​ ​ ​ ​ ​ 양철 지붕과 봄비 / 오규원 ​ ​ ​ 붉은 양철 지붕의 반쯤 빠진 못과 반쯤 빠질 작정을 하고 있는 못 사이 이미 벌겋게 녹슨 자리와 벌써 벌겋게 녹슬 준비를 하고 있는 자리 사이 퍼질러진 새똥과 뭉개진 새똥 사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또닥 또닥 소리를 내고 있는 봄비와 또닥 또닥 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봄비 사이 ​ ​ ​ ​ 오규원 시집 /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 ​ ​ ​ ​​ ​ ​

김옥희 씨 / 나호열

그림 / 김두엽 ​ ​ ​ ​ ​ 김옥희 씨 / 나호열​ ​ ​ ​ 열둘 더하기 열둘은? 이십사 팔 곱하기 팔은? 육십사 이백오십육 곱하기 이백오십육은? 아… 외웠는데 까먹었네, 생일이 언제? 구월 이십 팔일 오늘은 며칠? 그건 알아서 뭐해 그날이 그날이지 자목련 꽃진 지 이미 오래인데 ​왜 꽃이 안 피냐? 저 나무는… 아홉 시 반에 타야 하는 차를 아홉 시에 나와서 기다리는 여든여섯 살 김옥희 씨 가끔은 자기 이름도 잊어버리지만 저기 저기 주간치매보호센터 차가 오네… 불쌍한 노인네들 너무 많아 끌끌 혀를 차며 나를 잊어버리지만 ​ 오늘도 독야청청한 나의 어머니 김옥희 씨! ​ 감사합니다. 세수도 잘 하시고 이도 잘 닦으시고 화장실도 거뜬하시니 ​ 오늘도 감사합니다 ​ ​ ​ ​ ​ 나호열 시집 / 타인..

장마 (태백에서 보내는 편지) / 박준

​ ​ ​ ​ ​ ​ 장마 (태백에서 보내는 편지) / 박준 ​ ​ ​ ​ 그곳의 아이들은 한번 울기 시작하면 ​ 제 몸통보다 더 큰 울음을 낸다고 했습니다 ​ 사내들은 아침부터 취해 있고 ​ 평상과 학교와 공장과 광장에도 빛이 내려 ​ 이어진 길마다 검다고도 했습니다 ​ 내가 처음 적은 답장에는 갱도에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 그들은 주로 질식사나 아사가 아니라 터져나온 수맥에 익사를 합니다 ​ 하지만 나는 곧 그 종이를 구겨 버리고는 ​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 ​ ​ ​ ​ ​ ​ 박준 시집 /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 ​ ​ ​ ​​ ​

그리운 사람아 / 서현숙

그림 / 손정희 그리운 사람아 / 서현숙 햇살 드리운 창가에 앉아 차 한잔할 때면 돌아올 수 없는 길 떠나갔음에도 떠오르는 임 온 천지에 고운 꽃들이 내 마음처럼 가득하건만 아직도 바보처럼 생각하네 고독과 흐르는 세월이 수 없이 지나갔음에도 채워지지 않을 허전한 마음뿐 그리운 사람아 사무치는 그리움 죽은 후에나 잊히려나 차 한잔에 목메네. 서현숙 시집 / 오월은 간다

하늘의 두께 / 오규원

그림 / 윤복열 ​ ​ ​ ​ ​ 하늘의 두께 / 오규원 ​ ​ 투명한 햇살 창창 떨어지는 봄날 새 한 마리 햇살에 찔리며 붉은 나무에 앉아 있더니 허공을 힘차게 위로 위로 솟구치더니 하늘을 열고 들어가 그곳에서 파랗게 하늘이 되었습니다 오늘 생긴 하늘의 또 다른 두께가 되었습니다 ​ ​ ​ 오규원 시집 /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 ​ ​ ​ ​ ​ ​

마장동 / 신동호

그림 / 김두엽 ​ ​ ​ ​ 마장동 / 신동호​ ​ ​ 마장동에서는 네발로 걸어도 된다 간혹 소처럼 우우 울어도 뭐라 안 한다 ​ 소가 흘린 만큼 눈물을 쏟아내도 그저 슬그머니 소주 한병 가져다놓는 곳 ​ 죽음을 닮아 삶으로 내놓기를 반복해서 달구지 구르듯 고기 굽는 소리 들리는 곳 ​ 인생도 굴러가다보면 깨닫는 게 있고 닳고 닳아 삐걱거리다보면 기준도 생기는 법 ​ 축산물시장의 처녑에선 풀 냄새가 난다 한숨을 주워 담는 어머니들이 있다 ​ 막막한 꿈이 흔들거릴 땐 마장동에 간다 네발로 기다가 끔뻑끔뻑, 울어도 좋을 ​ ​ ​ ​ 시집/ 그림자를 가지러 가야 한다 ​ ​ ​ ​ ​ ​​ ​

어린아이 / 빅토르 마리 위고

작품 / 한치우 ​ ​ ​ ​ ​ 어린아이 / 빅토르 마리 위고 ​ ​ ​ ​ 터키 군대가 지나간 곳은 모든 게 폐허와 멸망, 술 익는 섬나라 키오도 이제는 한낱 어두운 암초 일 뿐. 소사나무 울창했던 키오여! 흐르는 물결 속엔 수풀이 어른대고 산 언덕 옛 궁성 또한 비치고, 밤이면 때로는 춤추는 처녀들의 모습도 비춰 주더니, 키오여! ​ 모든 것은 사막, 단지 불탄 성벽 옆에 파란눈의 그리스 소년이 상처입은 머리를 숙이고 앉아 있다. 이제는 잊혀진 그 잿더미 속에서 그가 의지할 피난처는 그를 닮아 핀 한 송이 산사나무꽃. ​ 뾰족한 바위에 맨발로 서 있는 가엾은 소년아, 하늘같이 파도같이 그리도 푸른 네 눈에 어리는 눈물을 닦으려면, 네 슬픈 눈물이 기쁨과 즐거움의 빛이 되어 저 하늘 속에서 한 줄기 ..

단비 / 박준

. 단비 / 박준 올해 두 살 된 단비는 첫배에 새끼 여섯을 낳았다 딸은 넷이었고 아들이 둘이었다 한 마리는 인천으로 한 마리는 모래내로 한 마리는 또 천안으로 그렇게 가도 내색이 없다가 마지막 새끼를 보낸 날부터 단비는 집 안 곳곳을 쉬지 않고 뛰어다녔다 밤이면 마당에서 길게 울었고 새벽이면 올해 예순아홉 된 아버지와 멀리 방죽까지 나가 함께 울고 돌아왔다 박준 시집 /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