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 1387

​허공을 적시는 분홍 / 이현경

그림 / 한회숙 ​ ​ 허공을 적시는 분홍 / 이현경 ​ ​ 빈 가지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가 ​ 꽃 피는 속도로 우리들의 눈을 끌어모으고 있다 ​ 허공을 적시는 분홍 꽃잎이 수면에 접사되어 호수 둘레에 웃음이 떠 있다 ​ 벚꽃 무리를 어루만지는 바람의 손 ​ 화심이 머문 곳에 갓 나온 향기가 나비를 두근거리게 한다 ​ 바람을 열고 수만 개의 이야기로 부푸는 벚꽃을 무수히 읽고 있으면 ​ 저 공중에 어린 체온이 두근두근 마음을 휘감는다 ​ ​ ​이현경 시집 / 맑게 피어난 사색 ​ ​ ​ ​ ​ ​

파리의 네루다를 뒤덮는 백설 송가

그림 / 박삼덕 ​ ​ ​ 파리의 네루다를 뒤덮는 백설 송가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 中에서) ​ ​ 은은하게 걷는 부드러운 동반자, 하늘의 풍요로운 우유, 티 하나 없는 우리 학교 앞치마, 호주머니에 사진 한 장 구겨 넣고 이 여관 저 여관 헤매는 말 없는 여행자의 침대 시트. 하늘거리는 귀공녀들, 수천 마리 비둘기 날개, 미지의 이별을 머금은 손수건. 나의 창백한 미인이여, 파리의 네루다 님에게 푸근하게 내려다오. 네 하얀, 제독의 옷으로 그를 치장해 다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를 사무쳐 그리는 이 항구까지 네 사뿐한 순양함에 태워 모셔와 다오. ​ ​ ​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中에서)

그림 / 서명덕 ​ ​ ​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中에서) ​ ​ '벌거벗은' 당신은 그대 손만큼이나 단아합니다. 보드랍고 대지 같고 자그마하고 동그랗고 투명하고 당신은 초승달이요 사과나무 길입니다. '벌거벗은' 당신은 밀 이삭처럼 가냘픕니다. '벌거벗은' 당신은 쿠바의 저녁처럼 푸릅니다. 당신 머리결에는 메꽃과 별이 빛납니다. '벌거벗은' 당신은 거대하고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여름날의 황금 성전처럼. ​ ​ ​​ ​

2023강원일보 신춘문예

그림 / 강선아 귤이 웃는다 / 백숙현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가 담배를 돌렸다 담배에서 녹차 맛이 났다 가볍고 부드러운 음악이 흘렀다 연기처럼 가벼워지고 싶었다 외투를 벗었다 양말을 벗었다 묶었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스카프를 휘날리며 춤을 추었다 친구들이 킥킥대며 웃어댔다 그들을 향해 탁자에 있던 귤을 던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머리에 명중하자 웃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벽이 눈물을 흘렸다 깨진 귤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창문은 창문 탁자는 탁자 술잔은 술잔 귤은 귤 그러므로 나는 나 브래지어를 벗어 던졌다 도마와 밥솥을 집어 던졌다 저울과 모래시계와 금이 간 거울 때 묻은 경전과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던졌다 담배 한 개비 다 타들어 가도록 나는 던져버릴 게 너무 많았다 *가브리엘 가르세아 마르케스의 소설 심..

신창 시장, 긴 편지 / 이 효

그림 / 임천 신창 시장, 긴 편지 / 이 효 할멈을 끌고 간다 언제 어디서나 부르면 굴러온 작은 바퀴 이젠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이 없다 오늘은 할망구 생일 밥상에 덜렁 혼자 앉으니 지난 세월 허두 미안혀 울컥 생목 오른다 석탄 같이 타들어간 당신 먼저 하늘로 보낸 것 같아 신창 시장 달달달 돌며 매일 용서를 구한다 천천히 가유 영감 귓전에 들리는 할멈 목소리 화들짝 놀라 뒤돌아 보니 늙은 아이 홀로 긴 편지 끌고 간다 시집 / 도봉열전 (도봉 문화원) *우리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다

2023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그림 / 장소영 2023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책을 끓이다 / 장현숙 ​ 책은 책마다 맛이 다르다 ​ 초록 표지의 책에선 식물의 맛이 나고 지구에 관한 책에선 보글보글 빗방울 소리가 나고 어류에 관한 책에선 몇천 년 이어온 강물 소리가 난다 곤충에 관한 책에선 더듬이 맛이 나, 이내 물리지만 남쪽 책장은 마치 텃밭 같아서 수시로 펼쳐볼 때마다 넝쿨이 새어 나온다 오래된 책일수록 온갖 눈빛의 물때와 검정이 반들반들 묻어있다 두꺼운 책을 엄지로 훑으면 압력밥솥 추가 팔랑팔랑 돌아간다 침실 옆 책꽂이 세 번째 칸에는 읽고 또 읽어도 설레는 연애가 꽂혀 있다 쉼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누군가와 겹쳐진다 그러면 따옴표가 보이는 감정을 챙겨 비스듬히 행간을 열어놓는다 새벽까지 읽던 책은 바짝 졸아서 타는 냄새가 ..

벽속의 어둠 / 이 효

그림 / 이경수 벽속의 어둠 / 이 효 흔들리는 나뭇잎이라도 잡고 싶습니다 나뭇잎도 작은 입김에 흔들리는데 아! 하나님 당신의 숨 한 번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하얀 침대 위 어머니 얼음이 되어간다. 태어나서 스스로 가장 무능하게 느껴진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초라함에 울음도 표정을 잃어버린다. 눈물마저 원망스러운데 창문 넘어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 가지 끝 미세한 흔들림이 눈동자를 찌른다. 아니 그 떨림을 잡고 싶었다. 간절한 기도가 눈발로 날린다. 당신의 숨 한 번 불어주시길~~ 오! 나의 어머니

눈부신 햇살 / 나호열

그림 / 박삼덕 눈부신 햇살 / 나호열 아침에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하다 눈뜨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해맑은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아무도 오지 않은 아무도 가지 않은 새벽길을 걸어가며 꽃송이로 떨어지는 햇살을 가슴에 담는 일이 행복이다 가슴에 담긴 것들 모두 주고도 더 주지 못해 마음 아팠던 사랑을 기억하는 일이 행복이다 나호열 시집 / 바람과 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