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나비 / 김기림 그림 / 김선옥 바다와 나비 /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 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 시리다 김기림 시집 / 바다와 나비 문학이야기/명시 2023.03.07
손님처럼 / 나태주 그림 / 유진선 손님처럼 / 나태주 봄은 서럽지도 않게 왔다가 서럽지도 않게 간다 잔치집에 왔다가 밥 한 그릇 얻어먹고 슬그머니 사라지는 손님처럼 떠나는 봄 봄을 아는 사람만 서럽게 봄을 맞이하고 또 서럽게 봄을 떠나보낸다 너와나의 사랑도 그렇지 아니하랴 사랑아 너 갈 때 부디 울지 말고 가거라 손님처럼 왔으니 그저 손님처럼 떠나거라. 나태주 대표시선집 / 걱정은 내 몫이고 사랑은 네 차지 문학이야기/명시 2023.03.06
수선화 / 윌리엄 워즈워스 그림 / 이경주 수선화 / 윌리엄 워즈워스 골짜기와 산 위를 떠도는 구름처럼 외로이 떠돌다가 떼지어 활짝 핀 황금빛 수선화를 문득 나는 보았네. 호숫가 줄지어 선 나무 밑에서 하늘하늘 미풍에 춤추는 것을. 은하에서 반짝이는 별들처럼 이어져 수선화는 강기슭에 끝없이 줄지어 뻗어 있었네. 나는 한눈에 보았네, 흥겹게 춤추며 고개를 살랑대는 무수한 수선화를. 호수도 옆에서 춤을 추지만 반짝이는 물결보다 더욱 흥겹던 수선화. 이렇듯 즐거운 벗과 어울릴 때 즐겁지 않은 시인이 있을까. 나는 그저 보고 또 바라볼 뿐 그 광경이 얼마나 값진 것임을 미처 몰랐었네. 어쩌다 하염없이 또는 시름에 잠겨 자리에 누워 있으면 수선화는 내 마음 속에 떠오르는 고독의 축복. 그럴 때면 내 가슴 기쁨에 넘쳐.. 문학이야기/명시 2023.03.05
봄의 서곡 / 정해란 그림 / 이경주 봄의 서곡 / 정해란 동토 딛고 선 인고의 시간이 끝날 무렵 식물들은 저마다 뭉친 수다를 풀어내려 곳곳이 가렵다 한파 속에서도 여전히 형형한 눈빛의 햇살에 두근거리는 생명들 이곳저곳 꼼지락거리며 뒤척이나 보다 잔설로 언 땅이 스멀스멀 다시 일어서고 수면이 두껍게 멈춘 물의 노래가 다시 흐르고 있다 갇혀있던 색들이 고개 들고 묶여있던 향기가 풀려나는 봄 기다리던 마음들도 징검다리 건너 자박자박 방향 찾아 마음속 꽃까지 환하게 피워냈으면 봄의 시작 모든 무게 벗은 가벼운 음표가 햇살의 첫 발자국처럼 경쾌하다 정해란 시집 / 시간을 여는 바람 문학이야기/명시 2023.03.04
팝니다, 연락주세요 / 최금진 그림 / 후후 팝니다, 연락주세요 / 최금진 화장실 변기통에 앉아서 콩팥을 팝니다 전화주세요,를 보다가 나는 내 장기를 팔아 노후를 준비하듯 우리나라를 조금씩 떼어서 해외로 수출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될 것이다 당겨쓴 카드빚과 텅 빈 통장을 생각하면 개인이 겪는 슬픔 따윈 아무것도 아닌 다수의 다수를 위한 두루마리화장지처럼 계속 풀려나오는 누구가의 슬픈 낙서 앞에서 나라가 있어야 개인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지 말자 누군가 나를 좀 팔아다오 나도 그에게 가서 기꺼이 삼사만원의 현찰이 되어줄 테니 의지할 곳 하나도 없이 늙어가는 건달들아 제 손금을 들여다 보지 마라 거기엔,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 은혜가 없다 그 손으로 태극기 앞에서 맹세할 의무가 없다 변기통의 물을 내리고 씩씩하.. 문학이야기/명시 2023.03.03
나는 속였다 / 헤르만 헤세 그림 /은둔자와 잠자는 안젤리카(공주) 나는 속였다 / 헤르만 헤세 나는 속였다. 나는 늙지 않았다. 인생에도 아직 지치지 않았다.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은 모두 맥백과 가슴을 뛰놀게 한다. 나는 꿈에서 본다. 정열에 넘치는 벌거숭이 계집들을. 좋은 계집과 나쁜 계집을, 흥분한 왈츠의 흥겨운 박자를 사랑을 속삭이던 많은 밤들을. 성스런 첫사랑의 애인과 같은 말없이 아름답고 아주 순결한 그런 애인도 꿈에서 본다. 그녀를 위하여 울 수도 있다. 시집 / 헤르만 헤세 시집 (송영택 옮김) 문학이야기/명시 2023.03.02
산낙지를 위하여 / 정호승 그림 / 신범승 산낙지를 위하여 / 정호승 신촌 뒷골목에서 술을 먹더라도 이제는 참기름에 무친 산낙지를 먹지 말자 낡은 프라스틱 접시 위에서 산낙지의 잘려진 발들이 꿈틀대는 동안 바다는 얼마나 서러웠겠니 우리가 산낙지의 다리 하나를 입에 넣어 우물우물거리며 씹는 동안 바다는 또 얼마나 많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겠니 산낙지의 죽음에도 품위가 필요하다 산낙지는 죽어가면서도 바다를 그리워한다 온몸이 토막난 채로 산낙지가 있는 힘을 다해 꿈틀대는 것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바다의 어머니를 보려는 것이다 정호승 시선집 / 내가 사랑하는 사람 문학이야기/명시 2023.03.01
슬픔이 택배로 왔다 / 정호승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슬픔이 택배로 왔다 / 정호승 슬픔이 택배로 왔다 누가 보냈는지 모른다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다 서둘러 슬픔의 박스와 포장지를 벗긴다 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 않는다 누가 보낸 슬픔의 제품이길래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이길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나에게 배송돼 왔나 포장된 슬픔은 나를 슬프게 한다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택배로 온 슬픔이여 슬픔의 포장지를 스스로 벗고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나에게만은 슬픔의 진실된 얼굴을 보여다오 마지막 한방울 눈물이 남을 때까지 얼어붙은 슬픔을 택배로 보내고 누가 저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지 그를 찾아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문학이야기/명시 2023.02.28
봉합된 세상 / 김명희 그림 / 신종섭 봉합된 세상 / 김명희 계곡 속, 뜨겁게 달아오른 빨간 체온들이 물속으로 뛰어든다 수면 아래서 물 밖 기억을 들출 때에는 봉합된 호흡의 분량이 필요하다 미량의 호흡 속에서 되살아나는 지난날들의 청춘과 실연들 규명되지 않은 불규칙한 혈압이 적나라하게 재생된다 폐 속에 갇힌 세상은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에 뜯기어 내 몸이 질식되는 동안 바깥 시간들은 어떤 인생들을 호흡하고 있을까 다시 물 밖으로 고개를 들자 게으르고 물컹한 공기 속에선 구름을 놓친 소나기 하나, 세속을 빠르게 지나치고 있었고 모든 휴식은 구리빛이었다 *시작 메모 : 이 시는 계곡에서 미역을 감는 순간을 표현했다 김명희 시집 / 화석이 된 날들 문학이야기/명시 2023.02.27
삶의 절반 / 요한 크리스타안 프리드리히 횔덜린 셔벗용 식탁 장식 : 조가비 장신구로 장식된 셔볏 *카를 6세 황제의 황후가 소유했던 것 삶의 절반 / 요한 크리스타안 프리드리히 횔덜린 노란 배와 거친 장미들이 가득 매달린, 호수로 향한 땅, 너희, 고결한 백조들, 입맞춤에 취한 채 성스럽게 냉정한 물속에 머리를 담근다. 슬프다, 겨울이면, 나는 어디서 꽃을 얻게 될까? 또한 어디서 햇빛과 지상의 그림자를? 장벽은 말없이 냉혹하게 그냥 서 있고, 바람결에 풍향기 소리만 찢긴다. 시집 / 우리의 가슴에 꽃핀 세계의 명시 문학이야기/명시 2023.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