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 1386

한강, 심장은 춤추고 싶다 / 이 효

그림 / 김정래​ ​ ​ ​ ​ 한강, 심장은 춤추고 싶다 / 이 효 ​ 물새 발자국 따라가니 천년 뱃사공 노래 흐른다 한강의 싱싱했던 눈 아파트 병풍에 둘러싸여 백내장 걸린다 푸른빛을 잃어버린 백제의 유물처럼 건져 올린 죽은 물고기 떼, 녹슨 비늘 펄펄 뛰던 꿈은 비린 표정 비누 거품 집어삼킨 물고기들 점점 부풀어 오른 탄식 맑게 흘러가야 사람이고 강물이지 강물을 빠른 우편으로 부친다 ​ ​ ​ ​ 월간 신문예 (4월호) ​ ​ ​ ​

뜻밖의 만남 / 쉼보르스카

그림 / 박대현 ​ ​ ​ 뜻밖의 만남 / 쉼보르스카​ ​ ​ 우리는 서로에게 아주 공손하게 대하며, 오랜만에 만나서 매우 기쁘다고 말한다. ​ 우리의 호랑이들은 우유를 마신다. 우리의 매들은 걸어 다닌다. 우리의 상어들은 물에 빠져 허우적댄다. 우리의 늑대들은 훤히 열린 철책 앞에서 하품을 한다. ​ 우리의 독뱀은 번개를 맞아 전율하고, 원숭이는 영감 때문에, 공작새는 깃털로 인해 몸을 부르르 떤다. 박쥐들이 우리의 머리 위로 멀리 날아가버린 건 또 얼마나 오래전의 일이던가. ​ 문장을 잇다 말고 우리는 자꾸만 침묵에 빠진다. 무력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 인간들은 대화하는 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 ​ ​ 쉼보르스카 시선집 / 끝과 시작 ​ ​ ​​ ​ 그림 / 김정수 ​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 종 해

그림 : 김 미 영 ​ ​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 종 해 ​ ​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우리 살아가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 시집 :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

서커스의 동물 / 쉼보르스카

그림 / 김정래 ​ ​ ​ 서커스의 동물 / 쉼보르스카​ ​ ​ 곰이 리듬에 맞춰 탭 댄스를 춘다, 사자가 풀쩍 뛰어올라 불타는 고리를 통과한다, 원숭이가 금빛 망토를 걸치고 자전거를 탄다, 휙휙 채찍 소리, 쿵짝쿵짝 음악소리, 휙휙 채찍 소리, 동물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코끼리가 머리 위에서 물병을 이고 우아하게 행진한다, 강아지들이 춤을 추며 신중하게 스텝을 밟는다. ​ 인간인 나, 심히 부끄러움을 느낀다. ​ 그날 사람들은 유쾌하게 즐기지 못했다. 그래도 박수 소리만큼은 요란하기 짝이 없다. 비록 채찍을 손에 쥔 기다란 내 팔이 모래 위에 날카로운 그림자를 드리웠어도. ​ ​ 쉼보르스카 시선집 / 끝과 시작 ​ ​ ​ ​​ ​ ​

한 사람의 진실 / 류시화

그림 / 다비드 자맹 ​ ​ ​ 한 사람의 진실 / 류시화 ​ ​ 한 사람이 진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람이 진실하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진실한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진실한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 모두가 거짓을 말해도 세상에 필요한 것은 단 한사람의 진실 모든 새가 날아와 창가에서 노래해야만 아침이 오는 것이 아니므로 한 마리 새의 지저귐만으로도 눈꺼풀에 얹힌 어둠 밀어낼 수 있으므로 꽃 하나가 봄 전체는 아닐지라도 꽃 하나만큼의 봄일지라도 ​ ​ ​ ​ 류시화 시집 /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 ​​ ​ ​

눈풀꽃이 나에게 읽어 주는 시 / 류시화

그림 / 다비드 자맹 ​ ​ ​ 눈풀꽃이 나에게 읽어 주는 시 / 류시화 ​ ​ 너의 걸작은 너 자신 자주 무너졌으나 그 무너짐의 한가운데로부터 무너지지 않는 혼이 솟아났다 무수히 흔들렸으나 그 흔들림의 외재율에서 흔들림 없는 내재율이 생겨났다 다가감에 두려워했으나 그 두려움의 근원에서 두려움 없는 자아가 미소 지었다 너의 봄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다 너 자신이 봄이다 너의 걸작 ​ ​ 류시화 시집 /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 ​ ​​ ​

사랑은 / 나호열

그림 / 김선옥 ​ ​​ ​ 사랑은 / 나호열 ​ 사랑은 꽃이 아니다 꽃 지고 난 후의 그 무엇 사랑은 열매가 아니다 열매 맺히고 난 후의 그 무엇 그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이 지상에 처음으로 피어나는 꽃 이 지상에 마지막으로 맺히는 열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 ​ ​ 나호열 시집 / 바람과 놀다 ​ ​ ​

석류 / 앙브루아즈 폴 투생 쥘 발레리

그림 / 기용 ​ ​ ​ 석류 / 앙브루아즈 폴 투생 쥘 발레리​ ​ ​ 알맹이들의 과잉에 못 이겨 방긋 벌어진 단단한 석류들아, 숱한 발견으로 파열한 지상의 이마를 보는 듯하다! ​ 너희들이 감내해온 나날의 태양이, 오 반쯤 입 벌린 석류들아, 오만으로 시달림받는 너희들로 하여금 홍옥의 칸막이를 찢게 했을지라도, ​ 비록 말라빠진 황금의 껍질이 어떤 힘의 요구에 따라 즙 든 붉은 보석들로 터진다 해도, 이 빛나는 파열은 내 옛날의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밀스러운 구조를 꿈에 보게 한다. ​ ​ ​ *시집 / 세계의 명시 ​ ​​ ​ ​​ ​

녹슨 도끼의 시 / 손택수

그림 / 권순창 ​ ​ ​​ ​ 녹슨 도끼의 시 / 손택수 예전의 독기가 없어 편해 보인다고들 하지만 날카로운 턱선이 목살에 묻혀버린 이 흐리멍덩이 어쩐지 쓸쓸하다 가만히 정지해 있다 단숨에 급소를 낚아채는 매부리처럼 불타는 쇠번개 소리 짝, 허공을 두쪽으로 가르면 갓 뜬 회처럼 파들파들 긴장하던 공기들, 저미는 날에 묻어나던 생기들 애인이었던 여자를 아내로 삼고부터 아무래도 내 생은 좀 심심해진 것 같다 꿈을 업으로 삼게 된 자의 비애란 자신을 여행할 수 없다는 것, 닦아도 닦아도 녹이 슨다는 것 녹을 품고 어떻게 녹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녹스는 순간들을 도끼눈을 뜬 채 바라볼 수 있을까 혼자 있을 때면 이얍, 어깨 위로 그 옛날 천둥 기합소리가 저절로 터져나오기도 하는 것인데, 피시식 알아서 눈치껏 ..

바다와 나비 / 김기림

그림 / 김선옥​ ​ ​ ​ 바다와 나비 / 김기림 ​ ​ ​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 청 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 시리다 ​ ​ ​ 김기림 시집 / 바다와 나비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