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제비나비 / 송찬호 그림 / 허경애 검은 제비나비 / 송찬호 앞으로 저 나비를 검은 히잡의 테러리스트라 부르지 말자 허리에 폭약을 친친 감고도 나비는 세계의 근심 앞에서 저리 가벼이 날고 있지 않은가 꽃들이 팡팡 터지는 봄날의 오후, 나비는 녹색 전선에 앉았다 붉은색 전선에 앉았다 아찔하게 생의 뇌관을 건드리고 있으니 우리도 꽃시장에서 만날 약속을 하루만 더 미뤄두자 송찬호 시집 / 분홍 나막신 문학이야기/명시 2023.05.19
푸른 그리움 / 정남식 그림 / 김경민 푸른 그리움 / 정남식 저 넓은 그리움을 어떻게 바라본다 말인가 저 넓은 푸른 그리움을 아무리 붉은 혀의 울음으로 울어도 바다는 푸르기만 하다 푸르름이 나를 절로 설레게 한다 이 푸름은 빛과 시간을 바꿔 가며 제 빛깔을 바꾼다 바다를 바라보면 볼수록 그리움의 그림자는 오, 사라지지도 않지, 수많은 겹의 물살을 치고 있다 물결의 살내를 저미는 갈매기가 이 바다를 다 볼 수 없듯 이 그리움을 다 그리워할 수 없다 그리움의 끝이 어떻게 지워질 것인가 서녘 해거름에 눈빛 빨갛게 물들어 마침내 별빛에 쏘이다가 어둠으로 푸른 어둠으로 내가 지워지기 전까지 정남식 시집 / 입가로 새가 날아왔다 문학이야기/명시 2023.05.18
산다는 것 / 이시가키 린 그림 / 박학성 산다는 것 / 이시가키 린 안 먹고는 살 수가 없다. 밥을 푸성귀를 고기를 공기를 빛을 물을 부모를 형제를 스승을 돈도 마음도 안 먹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부풀어 오른 배를 안고 입을 닦으면 주방에 널려 있는 당근 꼬리 닭 뼈다귀 아버지 창자 마흔 살 해질녘 내 눈에 처음으로 넘치는 짐승의 눈물. 책 / 시의 힘 현암사 문학이야기/명시 2023.05.17
꽃밥 / 엄재국 이팝나무 꽃밥 / 엄재국 꽃을 피워 밥을 합니다 아궁지에 불 지피는 할머니 마른 나무 목단, 작약이 핍니다 부지깽이 할머니 눈 속에 홍매화 복사꽃 피었다 집니다 어느 마른 몸들이 밀어내는 힘이 저리도 뜨거울까요 만개한 꽃잎에 밥이 끓습니다 밥물이 넘쳐 또 이팝꽃 핍니다 안개꽃 자욱한 세상, 밥이 꽃을 피웁니다 시집 / 정끝별의 밥시 이야기 밥 문학이야기/명시 2023.05.16
목계장터 / 신경림 그림 / 이미화 목계장터 /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울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겨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세속적 가치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시인의 삶의 자세를 자연의 모습에 비겨 표현한 작품이다 시집 / 우리 시 10.. 문학이야기/명시 2023.05.15
종이 배를 타고 / 정호승 사진 종이 배를 타고 / 정호승 종이배를 타고 바다로 간다 따라오지 마라 맨발로 부두까지 달려나와 울지마라 종이배는 떠나가는 항구가 없다 슬픈 뱃고동 소리도 울리지 않는다 나를 침몰하기 위해 바다를 향하는 게 아니다 갈매기를 데리고 내 평생 타고 다닌 배가 오직 종이배였을 뿐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다에도 종이배의 뱃길을 내기 위해 종이배를 타고 먼 바다로 간다 정호승 시집 /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문학이야기/명시 2023.05.14
양쪽 귀를 접은 페이지 / 김혜순 그림 / 성기혁 양쪽 귀를 접은 페이지 / 김혜순 엄마, 이 페이지는 읽지마 읽지 말라고 접어놓은 거야 새들이 뾰족한 부리를 하늘에 박고 눈물을 떨어뜨리네 새를 불게 하라 때려서라도 불게 하라 명령이 타이핑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받아쓴 건 맥박보다 더 빠른 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였는데 젖은 발가락이 내 얼굴을 더듬고 혀도 입술도 없는 내가 제발 살려주세요 이 엘리베이터는 올라가는 버튼이 없고 영안실은 물속에 있습니다만 부엌에서 너를 때렸을 때 새를 때리는 것 같았어 말하는 엄마 다 맞고 나서 너는 방으로 들어가 가만히 날개를 폈지 이것아 불쌍한 것아 (세상의 모든 신호등이 붉은색을 켜 든 고요한 밤 나는 엄마를 따라간다 나는 물속의 깊은 방문을 연다 거기 고요한 곳 엄마가 아가에게 젖을 물리고 일렁이는 .. 문학이야기/명시 2023.05.12
수레 / 최금진 그림 / 이종석 수레 / 최금진 그의 아버지 처럼 그도 나면서부터 하반신에 수레가 달려 있었다 당연히, 커서 그는 수레 끄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폐품을 찾아 개미굴 같은 골목을 헤매고 다녔다 바퀴에 척척 감기기만 할 뿐 결코 떨어지지 않는 길을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제 자신과 함께 다녔다 지겨워한 적도, 사랑한 적도 없었다 외발, 외발, 황새처럼 골라 디디며 바닥만 보고 걸었다 아랫도리에 돋아난 다 삭아빠진 수레를 굴리며 덜덜덜 몸을 떨면서 방바닥 식은 집에 돌아오곤 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의 뼈 몇개는 바큇살처럼 부러져 있었다 허리춤에 붙은 손잡이를 한번도 놓아본 적 없는 그에겐 언제나 고장나고 버려진 것들이 쌓여 있었다 아무도 대신 끌어주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날 그는 자신의 낡은 .. 문학이야기/명시 2023.05.10
벽이 온다 / 박설희 그림 / 김화숙 벽이 온다 / 박설희 밧줄에 의지해 암벽 하나를 간신히 넘어왔는데 또 밧줄이 드리워져 있다 얼마나 가야 하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벽이 온다 한 손 한 손 되짚어 내려간다 내려갈 힘은 아직도 남아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 절벽에 서 있는 소나무, 꺾는 각도가 절묘하다 공중을 더듬으며 길 찾는 목숨들 낭떠러지를 품고 산다 끝이라는 것은 새로운 방식으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것 씨앗을 잉태하는 것도 그 이유 절벽에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나무마다 절벽이 있다 빛의 화살은 길고 짧아서 목마르게 휘어지는 행로 파르르 떨던 나뭇가지 하나가 방금, 방향을 조금 틀었다 박설희 시집 / 가슴을 재다 문학이야기/명시 2023.05.07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 베르톨트 브레히트 그림 / 이종석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 베르톨트 브레히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 김남주 옮김 (남풍 , 1988) 문학이야기/명시 2023.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