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4/12 11

묵과 어머니 / 이효

묵과 어머니 / 이효간병인이 사라진 날 척추가 불안한 어머니 집 딸만 보면 묵을 쑨다 수직 궤도 벗어난 꼬부라진 허리 싱크대에 매달려 추가 된다 끈끈한 묵 나무 주걱으로 세월만큼 휘젓는다 불 줄여라 엄마의 잔소리는 마른 젖 오래 저어라 끈기 있게 살라는 말씀 쫀득하다 어머니 묵 그릇 같은 유언 눈동자에 싸서 집으로 가져온다 풀어보니 검게 탄 일생이 누워 있다 입안에서 엄마 생각이 물컹거린다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날개 없는 앵무새 / 이효

날개 없는 앵무새 / 이효 아침마다 지하철을 타는 남자파스만 한 카드를 댄다 앵무새가 낡은 가방을 마중 나온다 행복하세요 띡낡은 등산복이 지나간다행복하세요 띡 김밥 한 줄 든, 검정 비닐봉지 간다행복하세요 띡 허공에 무수하게 뿌려진 마른 말들 도시는 절망을 버릴 시간도 없다 행복은 허공에 썰물로 빠져나가는데날개도 없는 앵무새여! 잠잠하라 지하철 게이트를 지나는 순간 수천 마리의 심장 없는 앵무새 목소리 행복하세요 띡행복하세요 띡 띡행복하세요 띡 띡 띡 이효 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카테고리 없음 2024.12.25

숟가락을 놓다 / 이 효

그림 / 정도나숟가락을 놓다 / 이 효​낡은 부엌문 바람이 두들기는데빈 그릇에 바람 소리 말을 더듬고장작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둥근 밥상에 수저 두 개 올려놓고비린내 나는 생선을 굽는다할머니 나물 팔던 손으로부엌문 활짝 열어 놓았다​바람은 잠시 단추를 채우고 나간다그림자 된 춥고 외로운 사람들쓰러진 술병처럼 몸이 얼었다 녹는다산산이 발려진 생선 가시의 잔해들​무표정한 가시를 모아 땅에 묻는다상처 난 것들 위로 첫눈이 내린다​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부엌에 온기를 넣는 것​​​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

뭉크의 절규 / 이효

뭉크의 절규 /  이효두렵다는 것은 슬픈 것이다어미를 넘어트린 덩치 큰 염소칠판 위에 붙은 교훈 분필 가루가 되어 교실 안이 술렁인다무질서는 유죄일까? 무죄일까?옆구리 차기로 운동화 날아오고 교사의 비명은 털이 뽑혔다글썽인다, 겁에 질린 어린 눈망울들밟지 말아야 할 스승의 그림자는 구석기시대 유물이 되어 밟힌 지 오래다 병원으로 실려간 어미는 암막 커튼을 친다다시 초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천년이 흘러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들뭉크는 불안한 내일을 다시 부르고 있다이효 시인  / 장미는 고양이다

새해가 내려요 / 이효

새해가 내려요 / 이효 꿈틀거리는 지난 시간의 내장들끊어진 소통 위로 눈이 내린다 방전된 몸으로 새해를 넘어온 사람들아픈 손톱에 첫눈을 발라준다뽀얀 속살이 차곡차곡 쌓인 달력을 단다 말풍선에 매달린 섬들은 소통하고유리벽을 타는 용서가 녹아내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가 찰칵 찍어 놓은, 첫눈 오는 날핸드폰 속에서 풍겨오는 사람 내음눈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그렁한 눈발로 묻는다 까똑 까똑 까똑 이효 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콩고강 연가 / 이효

그림 / 박정실콩고강 연가 / 이 효 야자수는 홀로 노래 부른다고향은 외딴섬 수평선 너머 흑백 사진으로 몸살 앓는다 하루 종일 숲에서 서성이며고향의 소리를 더듬는다 마음 밭에 그리움이 붉다 숲은 한 방울의 눈물로 푸른 옷을 갈아입는다기억의 장소로 떠날 채비를 한다 섬과 섬 사이, 뼈마디로 다리를 놓는다홀로 출렁거렸을 침묵의 물결그리움은 먼 하늘이 된다 나무의 오랜 꿈, 석양에 쓰는 편지 슬프지만 잘 견디어 냈노라고이효 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삼각 김밥 번호 / 이효

​삼각 김밥 번호 / 이효​ 수저와 수저 사이의 기다림은 독거노인의 긴 한숨  현관문 열어 놓고이봐 젊은이, 날 좀 앉혀주게나 뼈만 남은 휠체어 바퀴를 보며슬금슬금 사라지는 그림자들  뒤척이던 바퀴가 편의점 가는 날삼각 김밥 하나, 풀지 못하는 남자 하얀 밥과 김 따로, 내 자식들 같다남자의 일회용 눈물이 쏟아진다 검정 모서리 씹는 서녘의 한 입쪼그리고 앉은 시간이 중얼거린다 이젠, 삼각 김밥마저 을큰하다​​​이효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박미섬의 홀리는 시집 읽기] 이효 시집 ‘장미는 고양이다’

오월의 발톱'을 세우고 비광飛光의 춤을!​  ​이효 시인​ ​시인은 고통에서 치유를, 슬픔에서 기쁨을 끌어내는 존재다. 시를 사랑하는 존재이면서 시를 통해 사랑을 전하는 존재다. ​제2시집 ‘장미는 고양이다’에서 이효 시인은 황폐한 현대성을 넘어서는 위험한 사랑을 감각적이고 독창적인 언어로 전해준다. 이는 ‘시인의 말’에 응축되어 있다.​ ​눈동자에 빛이 들어온다​ ​새벽을 통과한 나뭇가지들​ ​잎맥은 속도를 기억한다​ ​태양이 나뭇잎 위로 미끄러지면​은빛으로 변한 들고양이들​ ​飛光의 춤을 춘다​(‘시인의 말’)​ ​‘시인의 말’은 시집의 서문 격인 시. “태양이 나뭇잎 위로 미끄러지면” 들고양이들은 ‘비광’, 날아오르는 빛의 춤을 춘다.​은빛으로 변한 들고양이들의 자태가 사뭇 날렵하다.​ ​태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