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 1406

새해가 내려요 / 이효

새해가 내려요 / 이효 꿈틀거리는 지난 시간의 내장들끊어진 소통 위로 눈이 내린다 방전된 몸으로 새해를 넘어온 사람들아픈 손톱에 첫눈을 발라준다뽀얀 속살이 차곡차곡 쌓인 달력을 단다 말풍선에 매달린 섬들은 소통하고유리벽을 타는 용서가 녹아내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가 찰칵 찍어 놓은, 첫눈 오는 날핸드폰 속에서 풍겨오는 사람 내음눈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그렁한 눈발로 묻는다 까똑 까똑 까똑 이효 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콩고강 연가 / 이효

그림 / 박정실콩고강 연가 / 이 효 야자수는 홀로 노래 부른다고향은 외딴섬 수평선 너머 흑백 사진으로 몸살 앓는다 하루 종일 숲에서 서성이며고향의 소리를 더듬는다 마음 밭에 그리움이 붉다 숲은 한 방울의 눈물로 푸른 옷을 갈아입는다기억의 장소로 떠날 채비를 한다 섬과 섬 사이, 뼈마디로 다리를 놓는다홀로 출렁거렸을 침묵의 물결그리움은 먼 하늘이 된다 나무의 오랜 꿈, 석양에 쓰는 편지 슬프지만 잘 견디어 냈노라고이효 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삼각 김밥 번호 / 이효

​삼각 김밥 번호 / 이효​ 수저와 수저 사이의 기다림은 독거노인의 긴 한숨  현관문 열어 놓고이봐 젊은이, 날 좀 앉혀주게나 뼈만 남은 휠체어 바퀴를 보며슬금슬금 사라지는 그림자들  뒤척이던 바퀴가 편의점 가는 날삼각 김밥 하나, 풀지 못하는 남자 하얀 밥과 김 따로, 내 자식들 같다남자의 일회용 눈물이 쏟아진다 검정 모서리 씹는 서녘의 한 입쪼그리고 앉은 시간이 중얼거린다 이젠, 삼각 김밥마저 을큰하다​​​이효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박미섬의 홀리는 시집 읽기] 이효 시집 ‘장미는 고양이다’

오월의 발톱'을 세우고 비광飛光의 춤을!​  ​이효 시인​ ​시인은 고통에서 치유를, 슬픔에서 기쁨을 끌어내는 존재다. 시를 사랑하는 존재이면서 시를 통해 사랑을 전하는 존재다. ​제2시집 ‘장미는 고양이다’에서 이효 시인은 황폐한 현대성을 넘어서는 위험한 사랑을 감각적이고 독창적인 언어로 전해준다. 이는 ‘시인의 말’에 응축되어 있다.​ ​눈동자에 빛이 들어온다​ ​새벽을 통과한 나뭇가지들​ ​잎맥은 속도를 기억한다​ ​태양이 나뭇잎 위로 미끄러지면​은빛으로 변한 들고양이들​ ​飛光의 춤을 춘다​(‘시인의 말’)​ ​‘시인의 말’은 시집의 서문 격인 시. “태양이 나뭇잎 위로 미끄러지면” 들고양이들은 ‘비광’, 날아오르는 빛의 춤을 춘다.​은빛으로 변한 들고양이들의 자태가 사뭇 날렵하다.​ ​태양에서 ..

두부의 연가 / 이효

​​두부의 연가 / 이효 ​ 검정 비닐 속 뭉개진 두부는 버리지 마, 기울어지는 식탁 모서리냉장고 속에서 냉기를 먹는 하루 황금 들판을 기억하며멍석 위에서 슬픔을 말리는 여자 누군가 힘껏 내리친 도리깨꿈은 먼 하늘로 튕겨나간다 탁탁 탁탁탁 탁탁 탁탁모진 시간이 여자의 껍질을 벗긴다 차가운 물속에서 불은 낮과 밤 젖은 몸 일으켜 세운다 세상 오래 살다 보면 두부도 뭉개지잖아 여자의 무너진 몸이 우렁우렁 운다 서로의 얼굴에 생채기를 낸 저녁열 개의 손가락으로 만두를 다시 빚는다 무너진 사랑은 저버리는 게 아니야    이효 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감나무와 어머니 / 이효

​​감나무와 어머니 / 이효​ 당신과 함께 심었습니다손가락만 한 감나무 돌짝밭 손끝이 닳도록 함께 땅을 파내려 갔습니다 바람은 햇살을 끌어다 주고가족은 새벽을 밀었습니다 오늘, 그 감을 따야 하는데 당신은 가을과 함께 먼 곳으로떠나셨습니다 식탁 위 접시에 올려진 감 하나차마 입으로 깨물지 못합니다 한평생 자식들에게하나님의 사랑과 헌신을온몸으로 땅에 쓰고 가르치신 어머니 그렁한 내 눈은 붉은 감빛이 되었습니다​ ​이효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더벅머리 여름 / 이 효

그림 / 백남성​​ ​더벅머리 여름  물속에서 소리와 빛깔을 터트린다도시인들 자존심도 태양 아래서 가식의 옷을 벗는다  영혼이 푸른 더벅머리 나무 위로 하얀 물고기들 흘러간다도시의 자존심을 물에 헹군다 발가벗고 물장구치던 더벅머리 아이들 여름이 가위로 잘려나가기 전 다시 한번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슬픈 도시를 영롱한 눈빛으로 채운다   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

루주가 길을 나선다 / 이효

그림 / 김정현   루주가 길을 나선다 / 이효  잊혀진 한 사람이 그리울 때 안부는 붉다 시작과 끝은 어디쯤일까 헤어질 때, 떨어진 저 침묵 루주가 진해질수록 그리움의 변명은 파랗다 인연은 호수에 배를 띄워 다가가는 것 거울 앞 침침한 시간들 부러진 루주 끝에도 심장은 뛴다  내가 먼저 길을 나서는 것은  슬픔과 후회가 거기 있기 때문 운명을 바른다   시집 / 장미는 고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