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 1363

눈을 감고 깊어지는 날 / 이현경

​ ​ ​ ​ ​ 눈을 감고 깊어지는 날 / 이현경​ ​ ​ 누가 눈동자를 메우고 있나 ​ 몇 걸음 안 되는 곳에서도 자식을 선뜻 알아보지 못한다 ​ 어린 자식들 눈에 언어를 깨우쳐 주던 동공에는 해가 기울고 시간의 물결을 건너가는 동안 한 여인의 삶이 출렁인다 ​ 낮은 물결로 때로는 거친 너울로 삶을 뒤척이던 모든 생애 ​ 기억은 흐릿해지고 눈가에는 자식들이 흥분이 맺혀 있다 ​ 마음이 깊어지는 날 어머니가 차오른다 ​ ​ ​ ​ 이현경 시집 / 허밍은 인화되지 않는다 ​ ​ ​ ​​ ​

소녀 / 박소란

그림 / 신종식 ​ ​ ​ ​ 소녀 / 박소란​ ​ ​ ​ 한쪽 눈알을 잃어버리고도 벙긋 웃는 입 모양을 한 인형 다행이다 인형이라서 ​ 오늘도 말없이 견디고 있다 소녀의 잔잔한 가슴팍에 안겨서 ​ 소녀는 울음을 쏟지 않고 아픈 자국을 보고도 놀라지 않지 슬픔은 유치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 ​ 갈색과 녹색처럼 헷갈리기 쉬운 것 ​ 스케치북 속 흐드러진 풍경은 갈색 철 지난 이불에 파묻혀 앓는 엄마 얼굴은 녹색 짙은 녹색 아무도 놀러 오지 않는 방 ​ 고장난 인형이 캄캄 뒤척이다 잠든 방은 어여쁜 분홍색, 좁다란 창에 묶여 휘늘어진 어둠의 리본처럼 ​ 혼자서 가만히 색칠하는 소녀 ​ 다행이다 소녀라서 이대로 잠시 빨갛게 웃을 수 있었어 ​ ​ ​ ​ ​ 박소란 시집 / 심장에 가까운 말 ​ ​ ​ ​ ​..

미혹 (迷惑) / 강해림

그림 / 정경숙 ​ ​ ​ ​ ​ 미혹 (迷惑) / 강해림 ​ ​ ​​ 꼬리를 잘리고도 달아나는 붉은 문장이었거나 , 미혹 迷惑 의 슬픈 올가미였거나 , 천형을 화관처럼 머리에 쓴 ​ 나는 아홉 번 죽었다가 열 번 다시 태어났다 ​ 나의 내면은 늘 에로틱한 상상으로 뜨겁지 어떤 날은 물과 불로 , 또 어떤 날은 빛과 어둠으로 ​ 서로 체위를 바꿔가며 들끓는 , 이상한 가역반응에 사로잡힌 발칙한 언어로 스스로 미끼가 되었지 ​ 저울 위의 고깃덩이처럼 어디가 입이고 항문인지 , 금기와 배반의 이 미지만 괄약근처럼 오므렸다 펼쳤다 하는 ​ 나는 한 마리 유혈목이 , 금단의 땅에서 쫓겨난 이후로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지의 첫 문장이다 ​ 고통과 황홀은 한 종족이었던 것 불의 혓바닥에 감겨 , 불의 고문을 견 딘..

눈물 / 김현승

그림 / 김애자 ​ ​ ​ ​ ​ 눈물 / 김현승​ ​ ​ ​ ​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 흠도 티도, 금 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 김현승 시집 / 가을의 기도 ​ ​ ​ ​ ​ ​​ ​ ​​ ​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 이원

그림 / 신명숙​ ​ ​ ​ ​ ​ ​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 이원 ​ ​ 7cm의 하이힐 위에 발을 얹고 ​ 얼음 조각에서 녹고 있는 북극곰과 함께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 불이 붙여질 생일 초처럼 고독하다 케이크 옆에 붙어온 프라스틱 칼처럼 한 나무에 생겨난 잎들만 아는 시차처럼 고독하다 ​ 식탁 유리와 컵이 부딪치는 소리 ​ 죽음이 흔들어 깨울 때 매일매일 척추를 세우며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 텅 빈 영화상영관처럼 파도 쪽으로 놓인 해변의 의자처럼 아무데나 펼쳐지는 책처럼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 오늘의 햇빛과 함께 문의 반목처럼 신발의 번복처럼 번지는 물처럼 ​ 우리는 고독하다 ​ 손바닥만 한 개의 목줄을 매고 모든 길에 이름을 붙이고 숫자가 매겨진 상자 안에서 천 개가 넘는 전..

사랑은 / 박수진

그림 / 이경주 ​ ​ ​ ​ ​ 사랑은 / 박수진​ ​ ​ ​ 사랑은 짐을 들어 주는 게 아니라 마음을 들어 주는 것이다 사랑은 내 마음에 등불이 켜지는 거 어둠 속에 빛이 켜지는 거 겨울에도 72도의 체온 속에 상처를 녹이는 것이다 사랑은 지상에서 아름다운 꽃을 같이 가꾸는 것 선인장 잎에서 가시를 뽑고 꽃이 피게 하는 것이다 내 심장에 산소를 넘치게 하여 지평선 끝까지 뛰게 하는 것이다 ​ ​ ​ ​ ​ 산굼부리에서 사랑을 읽다 / 박수진 ​ ​ ​ ​ ​

책등의 내재율 / 엄세원

그림 / 장소영 책등의 내재율 / 엄세원 까치발로 서서 책 빼내다가 몇 권이 끼우뚱 쏟아졌다 중력도 소통이라고 엎어진 책등이 시선을 붙들고 있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햇살이 배슥이 꽂혀와 반짝인다 정적을 가늠하며 되비추는 만화경 같은 긴 여운, 나는 잠시 일긋일긋 흔들린다 벽장에 가득 꽃힌 책제목 어딘가에 나의 감정도 배정되었을까 곁눈질하다 빠져들었던 문장을 생각한다 감각이거나 쾌락이거나 그날 기분에 따라 수십 번 읽어도 알 수 없는 나라는 책 한 권, 이 오후에 봉인된 것인지 추수르는 페이지마다 깊숙이 서려 있다 벽 이면을 온통 차지한 책등 그들만의 숨소리를 듣는다 어둠을 즐기는 안쪽 서늘한 밀착, 이즈음은 표지가 서로의 경계에서 샐기죽 기울 때 몸 안에 단어들이 압살되는 상상, 책갈피 속 한 송이 압화..

협착의 헤게모니 / 장서영

그림 / 김종수 협착의 헤게모니 / 장서영 뼈와 뼈 사이가 수상하다 경추의 1번과 5번이 밀착되고 요추에 3번과 4번이 뒤틀렸다 그래서 넓어진 건 통증, 다물어지지 않은 연속성 엉덩이는 의자와 협착하고 마감일은 나와 협착하는데 몸에 담긴 뼈와 말에 담긴 뼈가 서로 어긋나서 삐딱한 시선과 굴절된 자세를 도모한다 책상과 내가 분리되기까지 뼈가 중심이라 생각을 한 번도 못 했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키보드 소리는 경쾌하고 새겨진 문장들은 마냥 과장됐다 어긋남은 순간이었다 뒤돌아보면 한쪽으로 치우친 건 언제나 나였고 오로지 솔직한 건 내 안의 그녀였다 움직이는 팔을 따라 마우스 줄을 따라 고이는 불협 예민해진 신경과 굳어진 근육 사이로 아픔이 비집고 들어와 지금 여기가 버겁게 흘러내렸다 무게 중심이 무기력 쪽으로 ..

눈 오는 날 / 이문희

그림 / 김이남 눈 오는 날 / 이문희 논밭들도 누가 더 넓은가 나누기를 멈추었다 도로들도 누가 더 긴지 재보기를 그만 두었다 예쁜 색 자랑하던 지붕들도 뽐내기를 그쳤다 모두가 욕심을 버린 하얗게 눈이 오는 날 은 시각적 이미지를 입체화한 것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되었던 동시다. 먼저 이 시의 공간적 이동은 논밭의 수평적 공간에서 점차 더 높은 도로 위로 이동하고 마침내 수직적 공간인 지붕으로 이동 한다. 넓이 길이 높이로 시적 공간을 입체화 하면서 눈 오는 날의 정경을 관찰자의 시점으로 조명하고 있는 점이 색다르다. *1997년 조선일보 신춘 문예 등단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