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 1387

조퇴 / 강희정

그림 / 안려원 조퇴 / 강희정 드르륵 교실문 열리는 소리 슨상님 야가 아침만 되믄 밥상머리에서 빗질을 했산단 말이요 긴 머리카락 짜르라 해도 안 짜르고 구신이 밥 달라 한 것도 아니고 참말로 아침마다 뭔 짓인지 모르것어라 킥킥 입을 가리고 웃어 대는 책상들 아버지는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낮술이 뺀질뺀질 빨갛게 웃고 있는 4교시 수업 시간 덩달아 붉어진 내 얼굴은 밖으로만 내달리고 싶어 아버님 살펴가세요 어서가세요 얘들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일찍 점심 먹고 운동장 나가 놀아라 나보다 먼저 교실 밖으로 나가버린 선생님 달걀 프라이가 들국화처럼 피어 있는 생일 도시락이 아버지 손을 잡고 산들산들 집으로 걸어간다

부치지 않은 편지1 / 정호승

그림 / 성기혁 부치지 않은 편지1 / 정호승 ​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이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 이슬에 새벽 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 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 정호승시집 / 새벽편지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그림 / 신종식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 1933년 동경 출생 *1955년 시 정적 (靜寂) 이 서정주에 의해 현대문학에 추천됨 *1962년 첫 시집 (춘향이 마음) 출간 *1970년 두 번째 시집 (햇빛 속에서) 출간 *1994년 한국 시인협..

만가(輓歌) / 도창회

그림 / 신종식 만가(輓歌) / 도창회 바람 탄 세월을 눈물로 머금어 보내고 설렘으로 다듬질 하던 방망이소리 이젠 가슴에 멎고 길바닥에 깔린 한 밟고 저승 먼 길 떠나간다 나뭇가지에 부는 부산한 바람따라 지난 삶의 희구들이 꽃상여에 매단 요령소리 되어 가을바람 타고 낙엽으로 난다 모서리마다 갈린 아픔 목피 쏟아 부른 노래 깊어서 더욱 서러운 외로운 넋을 어쩔고 망각천 깔고 앉아 엇가슴에 아린 속을 혈흔으로 달래도 떠나가면 다시 못 오리라 북망산 가는 길목 행여 이승소식 바람결에 들려와도 못들은 척 미련 두지 마소서 * 희구들이 (desire) 욕망, 원하다 * 망각천 / 온갖 감정의 탁류에 휩쓸리는 감정 * 북망산 / 죽음의 상징 산 도창회 교수님 *수필의 대가, 전 동국대 영문과 교수, *장시 *

풀 / 김수영

그림 / 조성호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시집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바람 부는 날의 풀 / 윤수천

그림 / 박중욱 바람 부는 날의 풀 / 윤수천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억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것을 보아라 풀들이 바람 속에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손을 굳게 잡아 주기 때문이다 쓰러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넘어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잡아주고 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 있으랴 이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도 우리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도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왜 넘어지지 않고 사는가를 보아라 아동 문학가, 시인, 수필가 충북 영동 출생(1942~) 1974, 소년중앙 문학상 1976,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나무 도마 / 신기섭

그림 / 김선기 나무 도마 / 신기섭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 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 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

물류 창고 / 이수명

그림 / 임영수 물류 창고 / 이수명 ​ ​ 우리는 물류 창고에서 만났지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차려 입고 느리고 섞이지 않는 말들을 하느라 호흡을 다 써 버렸지 ​ 물건들은 널리 알려졌지 판매는 끊임없이 증가했지 창고 안에서 우리들은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다른 방향으로 갔다가 돌아오곤 했지 갔던 곳을 또 가기도 했어 ​ 무얼 끌어내리려는 건 아니었어 그냥 담당자처럼 걸어 다녔지 바지 주머니엔 볼펜과 폰이 꽂혀 있었고 전화를 받느라 구석에 서 있곤 했는데 그런 땐 꼼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 ​ 물건의 전개는 여러모로 훌륭했는데 물건은 많은 종류가 있고 집합되어 있고 물건 찾는 방법을 몰라 닥치는 대로 물건에 손대는 우리의 전진도 훌륭하고..

화사花蛇 /서정주

그림 / 김정래 화사花蛇 /서정주 ​ ​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베암…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 꽃다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든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룽그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눌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무러뜯어, 다라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 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麝香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게 아니라 석유石油 먹은듯…석유石油 먹은듯…가쁜 숨결이야 ​ 바눌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 빛… 크레오파투라의 피먹은양 붉게 타오르는 고흔 입설이다…슴여라! 베암. ​ 우리순네는 스믈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흔 입설…슴여라! 베암. 서정주 시집 /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