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3/02 28

끝없는 길 (지렁이) / 최금진

그림 / 장정화 ​ ​ ​ ​ 끝없는 길 (지렁이) / 최금진​ ​ ​ 끔틀거리는 의지로 어둠속 터널을 뚫는다 덧난 상처가 다시 가려워지는 쪽이 길이라고 믿으며 흙을 씹는다 눈뜨지 않아도 몸을 거쳐가는 시간 이대로 멈추면 여긴 딱 맞는 관짝인데 조금만 더 가면 끝이 나올까 무너진 길의 처음을 다시 만나기로 할까 잘린 손목의 신경 같은 본능만 남아 벌겋게 어둠을 쥐었다, 놓는다 돌아보면 캄캄하게 막장 무너져내리는 소리 앞도 뒤도 없고 후퇴도 전진도 없다 누군가 파묻은 탯줄처럼 삭은 노끈 한 조각이 되어 다 동여매지 못한 어느 끝에 제 몸을 이어보려는 듯 지렁이가 간다, 꿈틀꿈틀 어둠에 血이 돈다 ​ ​ ​ ​ ​ 최금진 시집 / 새들의 역사 ​ ​ ​ ​ ​ ​ ​ ​

물의 온도 / 장혜령

그림 / 김미자 ​ ​ ​ 물의 온도 / 장혜령​ ​ ​ 바람이 지난 후의 겨울 숲은 고요하다 ​ 수의를 입은 눈보라 ​ 물가에는 종려나무 어두운 잎사귀들 ​ 가지마다 죽음이 손금처럼 얽혀 있는 ​ 한 사랑이 지나간 다음의 세계처럼 ​ 이 고요 속에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 초록이 초록을 ​ 풍경이 색채를 ​ 간밤 온 비로 얼음이 물소리를 오래 앓고 ​ 빛 드는 쪽으로 엎드려 잠들어 있을 때 ​ 이른 아침 맑아진 이마를 짚어보고 떠나는 한 사람 ​ 종소리처럼 빛이 번져가고 ​ 본 적 없는 이를 사랑하듯이 ​ 깨어나 물은 흐르기 시작한다 ​ ​ ​ ​ 장혜령시집 /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 ​ ​ ​​ ​

매화나무의 解産​ / 문태준

그림 / 신종식 ​ ​ ​ 매화나무의 解産​ / 문태준 ​ 늙수그레한 매화나무 한 그루 배꼽 같은 꽃 피어 나무가 환하다 늙고 고집 센 임부의 해산 같다 나무의 자궁은 늙어 쭈그렁한데 깊은 골에서 골물이 나와 꽃이 나와 꽃에서 갓난 아가 살갗 냄새가 난다 젖이 불은 매화나무가 넋을 놓고 앉아 있다​ ​ 문태준 시집 / 가재미 ​ ​ ​ ​ ​

장미의 내부 / 최금진

그림 / 이경주 ​ ​ ​ ​ 장미의 내부 / 최금진​ ​ ​ 벌레 먹은 꽃잎 몇장만 남은 절름발이 사내는 충혈된 눈 속에서 쪼그리고 우는 여자를 꺼내온다 ​ 겹겹이 마음을 허벅지처럼 드러내놓고 여자는 가늘게 흔들린다 ​ 노을은 덜컹거리고 병 안까지 적조가 번진다 ​ 같이 살자 살다가 힘들면 그때 도망가라 ​ 남자의 텅빈 눈 속으로 뚝뚝, 꽃잎이 떨어져 내린다 ​ ​ ​ *최금진 시집 / 황금을 찾아서 ​ ​ ​​ ​

호두나무와의 사랑​ / 문태준

그 림 / 김선옥 ​ ​ ​ ​ 호두나무와의 사랑​ / 문태준 ​ ​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애기집을 들어낸 여자처럼 호두나무가 서 있어서 가슴속이 처연해졌다 ​ 철 지난 매미떼가 살갗에 붙어서 호두나무를 빨고 있었다 ​ 나는 지난 여름 내내 흐느끼는 호두나무의 哭을 들었다 그러나 귀가 얇아 호두나무의 중심으로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불에 구운 흙처럼 내 마음이 뒤틀리는 걸 보니 나의 이 고백도 바람처럼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겠다 ​ ​ 문태준 시집 / 수런거리는 뒤란

청벚 보살 / 이수진

그림 / 신종섭 ​ ​​ ​ 청벚 보살 / 이수진 ​ 개심사 청벚나무 가지에 연둣빛 꽃이 눈을 떴다 ​ 얼마나 오래 기다려왔던 것일까 가지 하나 길게 내밀어 법당에 닿을 듯하다 꽃이 맑다 매화나무는 목탁 두드릴 때마다 꽃잎으로 법구를 읊고, 청매화는 동안거 끝에 심욕의 수피를 찢어 꽃망울 터트린다 저토록 신심(信心)을 다져왔기에 봄이 일주문에 들어설 수 있다 가지마다 허공으로 낸 구도의 길 제각각 가부좌 틀고 참선의 꽃들을 왼다 전각에서 내리치는 죽비소리 제 몸 쳐대며 가람으로 흩어지는 풍경소리 합장하듯 꽃잎들 맞이하고 있다 법당은 꽃들의 백팔배로 난분분하다 부처가 내민 손바닥에 청벚꽃잎 한 장 합장하듯 내려앉는다 ​ ​ ​ *2023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 ​ ​ ​ ​

꽃을 위한 서시 / 김춘수

그림 / 김선옥​ ​ ​​ ​ 꽃을 위한 서시 /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김춘수 시집 / 한국 대표시인 100인 선집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