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3/02 28

슬픔이 택배로 왔다 / 정호승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 ​​ ​ 슬픔이 택배로 왔다 / 정호승 슬픔이 택배로 왔다 누가 보냈는지 모른다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다 서둘러 슬픔의 박스와 포장지를 벗긴다 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 않는다 누가 보낸 슬픔의 제품이길래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이길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나에게 배송돼 왔나 포장된 슬픔은 나를 슬프게 한다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택배로 온 슬픔이여 슬픔의 포장지를 스스로 벗고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나에게만은 슬픔의 진실된 얼굴을 보여다오 마지막 한방울 눈물이 남을 때까지 얼어붙은 슬픔을 택배로 보내고 누가 저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지 그를 찾아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 ​ ​ ​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봉합된 세상 / 김명희

그림 / 신종섭 ​ ​ ​ ​ 봉합된 세상 / 김명희​ ​ ​ ​ 계곡 속, 뜨겁게 달아오른 빨간 체온들이 물속으로 뛰어든다 수면 아래서 물 밖 기억을 들출 때에는 봉합된 호흡의 분량이 필요하다 미량의 호흡 속에서 되살아나는 지난날들의 청춘과 실연들 규명되지 않은 불규칙한 혈압이 적나라하게 재생된다 폐 속에 갇힌 세상은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에 뜯기어 내 몸이 질식되는 동안 바깥 시간들은 어떤 인생들을 호흡하고 있을까 다시 물 밖으로 고개를 들자 게으르고 물컹한 공기 속에선 구름을 놓친 소나기 하나, 세속을 빠르게 지나치고 있었고 모든 휴식은 구리빛이었다 ​ ​ ​ *시작 메모 : 이 시는 계곡에서 미역을 감는 순간을 표현했다 ​ ​ ​ 김명희 시집 / 화석이 된 날들 ​ ​ ​​ ​ ​

삶의 절반 / 요한 크리스타안 프리드리히 횔덜린

셔벗용 식탁 장식 : 조가비 장신구로 장식된 셔볏 *카를 6세 황제의 황후가 소유했던 것 ​ ​ 삶의 절반 / 요한 크리스타안 프리드리히 횔덜린 ​ ​ ​ 노란 배와 거친 장미들이 가득 매달린, 호수로 향한 땅, 너희, 고결한 백조들, 입맞춤에 취한 채 성스럽게 냉정한 물속에 머리를 담근다. ​ 슬프다, 겨울이면, 나는 어디서 꽃을 얻게 될까? 또한 어디서 햇빛과 지상의 그림자를? 장벽은 말없이 냉혹하게 그냥 서 있고, 바람결에 풍향기 소리만 찢긴다. ​ ​ ​ ​ 시집 / 우리의 가슴에 꽃핀 세계의 명시 ​ ​ ​ ​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 송찬호

그림 / 심재관 ​ ​ ​ ​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 송찬호​ ​ ​ ​ 누가 저기다 밥을 쏟아 놓았을까 모락모락 밥집 위로 뜨는 희망처럼 늦은 저녁 밥상에 한 그릇씩 달을 띄우고 둘러앉을 때 달을 깨뜨리고 달 속에서 떠오르는 노오란 달 ​ 달은 바라만 보아도 부풀어 오르는 추억의 반죽 덩어리 우리가 이 지상까지 흘러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빛을 잃은 것이냐 ​ 먹고 버린 달 껍질이 조각조각 모여 달의 원형으로 회복되기까지 어기여차, 밤을 굴려 가는 달빛처럼 빛나는 단단한 근육 덩어리 달은 꽁꽁 뭉친 주먹밥이다. 밥집 위에 뜬 희망처럼, 꺼지지 않는 ​ ​ ​ ​ 시집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 ​ ​ ​

작은 소망 / 이해인

그림 / 서명덕 ​ ​ ​ 작은 소망 / 이해인​ ​ ​​ 내가 죽기 전 ​ 한 톨의 소금 같은 시를 써서 ​ 누군가의 마음을 ​ 하얗게 만들 수 있을까 ​ 한 톨의 시가 세상을 ​ 다 구원하진 못해도 ​ 사나운 눈길을 순하게 만드는 ​ 작은 기도는 될 수 있지 ​ 힘들 때 잠시 웃음을 찾는 ​ 작은 위로는 될 수 있겠지 ​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 나는 행복하여 ​ 맛있는 소금 한 톨 찾는 중이네 ​ ​ ​ 이해인 시집 / 고운 마음 꽃이 되고 고운 말은 빛이 되고 ​ ​ ​ ​

축하합니다 / 정호승

그림 / 송대호 축하합니다 / 정호승 이 봄날에 꽃으로 피지 않아 실패하신 분 손 들어보세요 이 겨울날에 눈으로 내리지 않아 실패하신 분 손 들어보세요 괜찮아요, 손 드세요, 손 들어보세요 아, 네, 꽃으로 피어나지 못하신 분 손 드셨군요 바위에 씨 뿌리다가 지치신 분 손 드셨군요 첫눈을 기다리다가 서서 죽으신 분도 손 드셨군요 네, 네, 손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실패를 축하합니다 천국이 없어 예수가 울고 있는 오늘밤에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갔습니다 드디어 희망 없이 열심히 살아갈 희망이 생겼습니다 축하합니다 정호승 시집 / 내가 사랑하는 사람

푸른밤 / 나희덕

그림 주인공 / 엘리자베트(시시)왕후 / 화가 : 요제프 호라체크( 1830-1885) 유화 *오스트리아 국민이 가장 사랑했던 왕후 ​ ​ ​ ​ 푸른밤 / 나희덕 ​ ​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과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 ​ ​ 시집 / 평생 간직하고 싶은 시 ​ ​

예전에는 미처 몰랐어요 / 김소월​

그림 / 신종섭 ​ ​ ​ 예전에는 미처 몰랐어요 / 김소월 ​ ​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에는 미처 몰랐어요 ​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 ​ 시집 / 평생 간직하고픈 시 ​ ​ ​ ​ ​

냉이꽃 / 이근배

그림 주인공 / 페르디 난트 2세 대공 ​ ​ ​ 냉이꽃 / 이근배 ​ ​ 어머니가 매던 김밭의 어머니가 흘린 땀이 자라서 꽃이 된 거야 너는 사상을 모른다 어머니가 사상가의 아내가 되어서 잠 못드는 평생인 것을 모른다 초가집이 섰던 자리에는 내 유년에 날아오던 돌멩이만 남고 황막하구나 울음으로도 다 채우지 못하는 내가 자란 마을에 피어난 너 여리운 풀은. ​ ​ ​ 시집 / 시인들이 좋아하는 한국 애송 명시 ​

사라져 가는 청춘 / 헤르만 헤세

그림 / 프란츠 요제프 1세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오스트리아 황제) ​ ​ ​ ​ 사라져 가는 청춘 / 헤르만 헤세 ​ ​ ​ 지친 여름이 고개를 드리우고 호수에 비친 그의 퇴색한 모습을 들여다본다. 피곤에 지친 나는 먼지에 싸여 가로수 그늘을 거닐고 있다. ​ 포플러 사이로, 있는 듯 없는 듯 바람이 지나간다. 내 뒤에 빨갛게 하늘이 타오르고 앞에는 밤의 불안이 -어스름이 -죽음이. ​ 지쳐, 먼지에 싸여 나는 걷는다. 그러나 청춘은 머뭇머뭇 뒤에 처져서 고운 머리를 갸웃거리고 나와 함께 앞으로 더 가려 하지 않는다. ​ ​ ​ ​ 헤르만 허세 시집 / 송영택 옮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