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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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 판매기 / 최승호

그림 / 김한겸 ​ ​ ​ ​ ​ ​ 자동 판매기 / 최승호 ​ ​ ​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는 게 커피가 쏟아지는 버튼을 둘러버렸다 습관의 무서움이다 ​ 무서운 습관이 나를 끌고 다닌다 최면술사 같은 습관이 몽유병자 같은 나를 습관 또 습관의 안개나라로 끌고 다니다 ​ 정신 좀 차려야지 고정관념으로 굳어가는 머리의 자욱한 안개를 걷으며 자, 차린다, 이제 나는 뜻밖의 커피를 마시며 ​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賣春婦(매춘부)라 불러도 되겠다 黃金(황금)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그대가 돈의 權能(권능)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 그러면 賣淫(매음)의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十字架(십자가)를..

꽃들 내 곁에 와서 눕다 / 김영자

그림 / 손정희 ​ ​ ​ ​ 꽃들 내 곁에 와서 눕다 / 김영자 ​ ​ ​ ​ 투명한 것을 보면 온몸에 전율이 인다 하늘, 시, 꽃, 꽃을 보면 모두 입술에 대어 보고 싶다 의미 없이 건네주던 그의 사랑 하롱하롱 잎이지는 꽃이었을까 불투명한 속에 함몰되는 두 눈 욕망과 질투심과 시기에 눈알을 굴리며 상처가 괴어 아픈 흔적을 남긴다 상처 위에 상처가 덧나면 살들은 투명해지는 것인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추한 음부를 내보이는 꽃들 내 곁에 와서 눕다. ​ ​ ​ ​ 김영자 시집 / 문은 조금 열려 있다 ​ ​ ​ ​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만정리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학과 문예창작과 석사 과정 졸업 1991년 김경린 선생 추천, 월간 으로 등단 1993년 2000년 2014년 를 내다 ​ ​ ​ ..

하늘 피자 (동시) / 이 효

하늘 피자 (동시) / 이 효 ​ ​​ 친구에게 보낸 하늘 피자 한 조각​ 도토리 잎으로 만든 상자​ 빨간 리본 대신 도토리 방울 달았다 ​ 톡톡톡 이슬방울 눌렀더니 구름 택배 아저씨 솔방울 바퀴 달려온다 ​ 다람쥐가 알려달라는 주소​ 참 좋군, 내 마음도 너랑 같이 있으면, 세상 어떠리 ​ 하늘 피자, 한 조각 친구네 집 부엌 창가에 맛난 미소로 걸어 놓았다 ​ ​ ​ ​ ​ ​​ ​

카테고리 없음 2023.09.01

​달팽이관 속의 두 번째 입맞춤 / 이효

작품 / 한치우​ ​ ​ ​ ​ ​​ ​ 달팽이관 속의 두 번째 입맞춤 / 이효 ​ ​ ​ 입맞춤을 연습해 본 적이 없어 광신도가 춤을 추던 그날 밤 생명이 자궁에 바늘처럼 꽂혔지 아빠라는 단어를 사막에 버린 남자 무표정한 가을이 오고, 혈액형을 쪼아대는 새들 끊어진 전선으로 반복된 하루 딱 한 번의 입맞춤 눈빛이 큰 불을 지핀 거야 모든 삶의 경계를 허물고 싶어 매일 밤, 암막 커튼을 치고 바다로 가는 꿈을 꿔 나쁜 생각들이 골수를 빼먹어 아비도 없는 애를 왜 낳으려고 하니? 이름도 모르는 신에게 아가 울음을 택배로 보낼 수 없잖아 나는 썩지 않는 그림자니까 어느 날, 종소리가 달팽이관을 뚫고 아기 숨소리 깃털이 된다 생명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거래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세상에 두 번째 입맞춤을 알릴 ..

나태주 / 좋은 약

© olga_kononenko, 출처 Unsplash 나태주 / 좋은 약 큰 병을 얻어 중환자실에 널부러져 있을 때 아버지 절룩거리는 두 다리로 지팡이 짚고 어렵사리 면회 오시어 한 말씀, 하시었다 얘야, 너는 어려서부터 몸은 약했지만 독한 아이였다 네 독한 마음으로 부디 병을 이기고 나오너라 세상은 아직도 징글징글하도록 좋은 곳이란다 아버지 말씀이 약이 되었다 두 번째 말씀이 더욱 좋은 약이 되었다 나태주 시집 / 오래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 schluditsch, 출처 Unsplash

바다를 굽다 / 조은설

© ainikolov, 출처 Unsplash ​ ​ ​ ​ ​ 바다를 굽다 / 조은설​ -고등어​ ​ ​ ​ 한 토막 바다를 잘라 석쇠 위에 올린다 ​ 서슬이 시퍼런 칼날 같은 등줄기, 파도를 휘감아 매우 치던 단단하고 날렵한 몸매 이젠 누군가의 재물로 누워 있다 ​ 미쳐 감지 못한 눈에 장엄한 일몰에 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산호초의 꽃그늘도 어둠 속에 저물었다 ​ 먼바다에서부터 서서히 귀가 열려 수심 깊은 계곡에서 들려오는 혹동고래의 낮은 휘파람 소리 ​ 나는 지금 수평선 한 줄 당겨와 빨랫줄을 매고 소금기 묻은 시간을 탁탁 털어 말린 후 바다 한 토막, 그 고소한 여유를 굽고 있다 ​ ​ ​ ​ ​ ​ ​ ​ ​ ​​ ​

나룻배와 행인 / 한용훈

나룻배와 행인 / 한용훈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 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새벽에 생각하다 / 천양희

그림 / 김남채 ​ ​ ​ ​ ​ ​ 새벽에 생각하다 / 천양희 ​ ​ ​ ​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노트르담의 성당 종탑에 새겨진 '운명'이라는 희랍어를 보고 「노트릍담의 꼽추」를 썼다는 빅토르 위고가 생각나고 연인에게 달려가며 빨리 가고 싶어 30분마다 마부에게 팁을 주었다는 발자크도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인간의 소리를 가장 닮았다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가 생각나고 너무 외로워서 자신의 얼굴 그리는 일밖에 할 일이 없었다는 고흐의 자화상이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어둠을 말하는 자만이 진실을 말한다던 파울 첼란이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소리 한 점 없는 침묵도 잡다한 소음도 훌륭한 음악이라고 한 존 케이지가 생각나고 소유를 자유로 바꾼 디오게네스도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담쟁이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 / 나호열

담쟁이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 / 나호열 혼자 서지 못함을 알았을 때 그것은 치욕이었다 망원경으로 멀리 희망의 절벽을 내려가기엔 나의 몸은 너무 가늘고 지쳐 있었다 건너가야 할 하루는 건널 수 없는 강보다 더 넓었고 살아야 한다 손에 잡히는 것 아무것이나 잡았다 그래, 지금 이 높다란 붉은 담장 기어 오르는 그것이 나의 전부가 아니야 흡혈귀처럼 붙어 있는 이것이 나의 사랑은 아니야 살아온 나날들이 식은땀 잎사귀로 매달려 있지만 저 담장을 넘어가야 한다 당당하게 내 힘으로 서게 될 때까지 사막까지라도 가야만 한다 - 태어난 곳을 그리워하면서도 더 멀리 달아나는 생명의 원심력 - 나호열 시집 / 바람과 놀다

내 몸에 자석이 있다 / 박찬세

그림 / 신종섭 ​ ​ ​ ​ ​ 내 몸에 자석이 있다 / 박찬세 ​ ​ 정신을 놓는 날이면 어김없이 내 침대 위다 여기가 어디지에서 어떻게 왔지로 뒤척이는 때이다 기억이 어항 밖으로 뛰쳐나온 뱀장어처럼 꿈틀대는 때이다 그때마다 내 몸에 자석이 있는 건 아닌지 짐짓 심각해져 보는 것인데 가끔 빗장 걸린 내 가슴이 활짝 열릴 때면 내가 키운 날짐승들이 무거운 날갯짓으로 이곳저곳 나를 부리고 다니다가 너무 많이 뱉어버린 말들을 물고 새들은 날아가고 내가 한껏 새처럼 가벼워지면 집이 풍기는 자장을 읽고 척하고 붙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내 몸에 자석이 있다 생각하니 의문이 풀린다 공중화장실 둘째 칸만 가는 것이나 단골 식당 메뉴판 아래만 앉는 것이나 서점 시집 코노에만 머무는 것이나 쇠막대에 자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