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물, 또는 내려가기 / 이태수

그림 / 심수진 물, 또는 내려가기 / 이태수 물을 마신다 아래로 내려가는 물, 나는 물과 더불어 흘러간다 물은 언제나 멈추기를 싫어한다 개울물이 아래로 흘러가고 강물은 몸을 비틀면서 내려간다 폭포는 수직으로 일어서듯 줄기차게 내리꽂힌다 물을 돌이켠다 안으로 스며드는 물, 새들이 낮게 날아 내리고 공중부양을 하던 뜬구름 몇 점이 제 무게 탓으로 떨어진다 가늘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며 빗금으로 뛰어내린다 빗줄기를 바라보는 내가 내린다 이태수 시집 / 내가 나에게 *1947년 경북 의성 출신 *1974년 으로 등단 *천상병 문학상, 동서 문학상, 카톨릭 문학상

노인 보호 구역 / 이희명

그림/ 강애란 노인 보호 구역 / 이희명 미군부대 뒷길 눈 감아도 보이는 크고 붉은 글씨 '노인보호구역' 낙엽이 그 길을 걷고 있다 몸 반쪽에는 이미 겨울이 와 버린 가랑잎 같은 한 목숨이 흘림체로 걷고 있다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흔들어 물속 길을 찾듯 뻣뻣한 팔로 허공에 노를 저으며 물풀 같은 그림자 따라 걷는다 체본 없이 완성한 그의 글씨체 벼루도 먹도 없어 맨몸으로 길바닥에 쓸 수밖에 없었던 그의 이력서 깊게 팬 이랑마다 수북이 쌓인 낙엽 걸음걸음 굽은 그림자 유서 같은 긴 편지를 쓰면서 간다 *2021 매일시니어문학상 당선작

슬픔이 빛어낸 빛깔 / 최경선

그림 / 방선옥 슬픔이 빛어낸 빛깔 / 최경선 저토록 도도한 빛깔을 본적 없다 했다 한때는 핓빛처럼 고운 그 꽃잎이 눈부셔 까닭 없이 울었다 했다 애타게 향기로운 척해보고 꿈꾸듯 별을 품어 토해내고 알 수 없는 허허로움에 목메던 시절이었노라고 빛바래고 바래다, 오지게 말라비틀어져 가는 그 모양이 당신 모습 같아 더 섧고도 서럽다 했다 하다 하다, 끝내는 열정과 슬픔 버무린 듯한 저 도도함이 눈물겹지 않으냐며 옹이 박힌 등허리 성스럽게 웅크리며 그녀 고요히 똬리를 튼다 최경선 시집 / 그 섬을 떠나왔다 *붙임성 댓글은 정중하게 사양합니다.

우편함 / 김소연

그림 / 강애란 우편함 / 김소현 우리는 매일 이사를 했습니다 아빠에겐 날짜가 중요했고 나에겐 날씨가 중요했습니다 아빠에겐 지붕이 필요했고 나에겐 벽이 필요했습니다 네가 태어날 때 부친 편지가 왜 도착하질 않니 아무래도 난 여기서 살아야겠구나 우편함은 아빠의 집이 됩니다 서랍에는 아빠의 장기기증서가 있어 내가 최초로 받은 답장이 되었습니다 날짜는 불필요하게 자라나고 날씨는 불길하게 늙어가고 춥다는 말이 금지어가 되어갑니다 보름달이 떴다는 말은 사라져 갑니다 모르는 가축들이 바들바들 떨고 있습니다 아빠, 하고 부르려다 맙니다 김소연 시집 / 수학자의 아침 티스토리로 이사 왔습니다. 조금 헤매고 있습니다. 댓글 잠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구름에게 / 나호열

그림 / 김예순 구름에게 / 나호열 구름이 내게 왔다 아니 고개를 들어야 보이는 희미한 입술 문장이 될 듯 모여지다가 휘리릭 새떼처럼 흩어지는 낱말들 그 낱말들에 물음표를 지우고 느낌표를 달아주니 와르르 눈물로 쏟아지는데 그 눈물 속에 초원이 보이고,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의 저녁이 보인다 구름이 내게 왔다 하나이면서 여럿인, 이름을 부르면 사슴도 오고 꽃도 벙근다 구름의 화원에 뛰어든 저녁 해 아, 눈부셔라 한 송이 여인이 붉게 타오른다. 와인 한 잔의 구름, 긴 머리의 구름이 오늘 내게로 왔다 나호열 시집 /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마음이 깨어진다는 말 / 천양희

그림 / 최연 마음이 깨어진다는 말 / 천양희 남편이 실직으로 고개 숙인 그녀에게 엄마, 고뇌하는 거야? 다섯 살짜리 딸 아이가 느닷없이 묻는다 고뇌라는 말에 놀란 그녀가 고뇌가 뭔데? 되물었더니 마음이 깨어지는 거야, 한다 꽃잎 같은 아이의 입술 끝에서 재앙 같은 말이 나온 이 세상을 그녀는 믿을 수가 없다 책장을 넘기듯 시간을 넘기고 생각한다 깨어진 마음을 들고 어디로 가나 고뇌하는 그녀에게 아무도 아무 말 해주지 않았다 하루 종일 길모퉁이에 앉아 삶을 꿈꾸었다 천양희 시집 / 새벽에 생각하다

사랑 / 오세영

그림 / 김미혜 사랑 / 오세영 세상사는 일이 무엇이던가 우주는 자연을 기르고, 자연은 생명을 기르고, 생명은 사랑을 기르고, 사랑은 또 우주를 기르나니 저 무심한 바위도 홀로 이끼를 기르지 않던가.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바위가 금 가지 않으려, 깨지지 않으려 버티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억만년 지구를 감싸안고 도는 태양의 사랑이여. 오세영 시화선집 / 바이러스로 침투하는 봄

명태 / 박은영

그림 / 한부열 명태 / 박은영 삼천포항 남해식당 메뉴는 생태찌개 한 가지다 늙은 여주인은 오늘 팔 한 궤짝의 생선을 육두문자로 손질한다 도마가 움푹 파이도록 칼질을 해도 비린내 나는 바닥 벗어날 길 없다며 어두운 지느러미를 내리친다 해로를 잃은 배 한 척, 삼천포 앞바다에 남자를 내어주고 그녀는 오살할 명태를 도마에 올렸다 긁어낸 내장과 대가리를 그러모으는 밤이면 삼천포대교를 건너지 못 한 날 들 이 뚝배기에서 진한 국물로 끓어올랐다 살점을 발라낸 초승달이 눈시울에서 오래 따끔거렸다 끼니때가 되자 넘실거리는 식당 안, 창난젓 명란젓 서리젓 사이 곰삭은 욕을 밥술에 얹어먹는 간간한 하루, 싱거운 농담들은 삼천포로 빠지고 닻을 올린 손님상마다 뱉어낸 토막 뼈가 수북하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는 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