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1/11 30

내가 나의 감옥이다 / 유 안 진​

그림 / 현 춘 자 ​ ​ ​ ​ ​ 내가 나의 감옥이다 / 유 안 진 ​ ​ ​ 한눈팔고 사는 줄을 진즉 알았지만 두 눈 다 팔고 살아온 줄은 까맣게 몰랐다 ​ 언제 어디에서 한눈을 팔았는지 무엇에다 두 눈 다 팔아먹었는지 나는 못 보고 타인들만 보였지 내 안은 안보이고 내 바깥만 보였지 ​ 눈 없는 나를 바라보는 남의 눈을 피하느라 나를 내 속으로 가두곤 했지 ​ 가시껍데기로 가두고도 떫은 속껍질에 또 갇힌 밤송이 마음이 바라면 피곤체질이 거절하고 몸이 갈망하면 바늘편견이 시쿵둥해져 겹겹으로 가두어져 여기까지 왔어라. ​ ​ ​ ​ 유안진 시집 / 다보탑을 줍다 ​ ​ ​ ​ ​ ​ ​ ​

네가 좋다 참말로 좋다 / 용 혜 원

그림 / 김 정 수 ​ ​ ​ ​ 네가 좋다 참말로 좋다 / 용 혜 원 ​ ​ ​ 네가 좋다 참말로 좋다 이 넓디넓은 세상 널 만나지 않았다면 마른나무 가지에 앉아 홀로 울고 있는 새처럼 외로웠을 것이다 ​ 너를 사랑하는데 너를 좋아하는데 내 마음은 꽁꽁 얼어버린 것만 같아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없으니 속 타는 마음을 어찌하나 ​ 모든 계절은 지나가도 또다시 돌아와 그 시절 그대로 꽃피어나는데 우리들의 삶은 흘러가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어 사랑을 하고픈 걸 어이하나 ​ 내 마음을 다 표현하면 지나칠까 두렵고 내 마음을 다 표현 못하면 떠나가 버릴까 두렵다 ​ 나는 네가 좋다 참말로 좋다 네가 좋아서 참말로 좋아서 사랑만 하고 싶다 ​ ​ ​ ​ 용혜원 시집 / 지금은 사랑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 ​ ​ ..

붉디붉은 그 꽃을 / 나 희 덕

그림 / 정 화 숙 ​ 나희덕 시집 / 사라진 손바닥 ​ ​ 붉디붉은 그 꽃을 / 나 희 덕 ​ ​ ​ 산그늘에 눈이 아리도록 피어 있던 꽃을 어느새 나는 잊었습니다 검게 타들어가며 쓰러지던 꽃대도, 꽃대도 받아 삼키던 흙빛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바위에 남겨진 총탄자국도, 꽃 속에 들리던 총성도, 더는 내 마음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 다, 잊었습니다, 잊지 않고는 그의 잎으로 피어날 수 없어 상상화인지 꽃무릇인지 이름조차 잊었습니다 꽃과 잎이 서로의 죽음을 볼 수 없어야 비로서 피어날 수 있다기에 붉디붉은 그 꽃을 아주 잊기로 했습니다 ​ ​ ​ 나희덕 시집 / 사라진 손바닥 ​ ​ 사진 / 정 관 용

감자떡 / 이 상 국

그림 / 조 은 희 ​ ​ ​ ​ ​ 감자떡 / 이 상 국 ​ ​ ​ 하지가 지나면 성한 감자는 장에 나가고 다치고 못난 것들은 독에 들어가 ​ ​ 가을까지 몸을 썩혔다 헌 옷 벗듯 껍질을 벗고 ​ 물에 수십 번 육신을 씻고 나서야 그들은 분보다 더 고운 가루가 되는데 ​ 이를테면 그것은 흙의 영혼 같은 것인데 강선리 늙은 형수님은 ​ 아직도 시어머니 제삿날 그걸로 떡을 쪄서 우리를 먹이신다 ​ ​ ​ ​ ​

들국화 / 천 상 병

그림 / 김 정 수 ​ ​ ​ ​ 들국화 / 천 상 병 ​ ​ ​ 산등선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 가을은 다시 올 테지. ​ 다시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 ​ ​ ​ *1930년 일본에서 출생 *1945년 김춘수 시인 주선으로 문예지에 추천됨 *1954년 서울대 상과대 수료 *1971년 유고시집 발간 *시집 *1993년 4월 28일 별세. ​ ​ ​ ​ ​

의자 / 이정록

그림 / 김 연 제 ​ ​ ​ ​​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라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데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 * 이정록 시집 / 의자 ​ ​ ​ ​ ​ ​

아버지의 그늘 / 신경림

그림 / 원 효 준 ​ ​ ​ 아버지의 그늘 / 신경림 ​ ​ ​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 장수도 있었다. ​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

가을 들녘에 서서 / 홍 해 리

그림 / 유 복 자 ​ ​ ​ ​ 가을 들녘에 서서 / 홍 해 리 ​ ​ ​ ​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나네 ​ ​ ​ ​ ​ ​ ​ 늦 가을 / 홍 해 리 ​ ​ 이제 그만 돌아서자고 돌아가자고 바람은 젖은 어깨 다독이는데 옷을 벗은 나무는 막무가내 제자리에 마냥 서 있었다 ​ 찌르레기 한 마리 울고 있었다 ​ 늦가을이었다 ​ ​ ​ *충북 청원 출생 *고려대 영문과 졸업(1964) *현재 대표 *시집 ​ ​

꽃의 이유 / 마 종 기

그림 / 박 송 연 ​ ​ ​ ​ 꽃의 이유 / 마 종 기 ​ ​ 꽃이 피는 이유를 전에는 몰랐다 꽃이 필 적마다 꽃나무 전체가 작게 떠는 것도 몰랐다 ​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누가 물어보면 어쩔까 ​ 꽃이 지는 이유는 전에는 몰랐다 꽃이 질 적마다 나무 주위에는 잠에서 깨어나는 물 젖은 바람소리 ​ ​ ​ ​ ​ *1939년 일본 출생 *서울대 대학원 졸업 *1959년 현대문학 시 등단 *시집 *수상경력 -한국문학 작가상 -편운 문학상 -이산 문학상 -동서 문학상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