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1/11 30

​세상이 밝았다 / 나호열

그림 / 김 정 수 ​ ​ ​ ​ ​ 세상이 밝았다 / 나호열 ​ ​ 내가 떠나온 곳을 향하여 미친 듯이 되돌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등진 곳을 향하여 허기진 채로 되돌아가는 나 이 거대한 허물 속에 껍데기 속에 우리는 무정란의 꿈을 낳는다 나란히 눕자 꿈은 잠들지 않으면 찾아오지 않는다 나란히 누워 죽은 듯이 잠들자 잠들 듯이 죽어버리자 우리는 날카로운 비명을 듣는다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무엇인가가 뛰쳐나오는 황급한 발자국 소리를 세상이 밝았다고 표현한다 허물분인 껍데기분인 세상에 꿈은 깨지기 위해 무섭게 꽃을 피운다 ​ ​ ​

소풍 / 나 희 덕

그림 / 김 한 솔 ​ ​ ​ ​ 소풍 / 나 희 덕 ​ 얘들아, 소풍 가자. 해지는 들판으로 나가 넓은 바위에 상을 차리자꾸나. 붉은 노을에 밥 말아먹고 빈 밥그릇 속에 별도 달도 놀러 오게 하자. 살면서 잊지 못할 몇 개의 밥상을 받았던 내가 이제는 그런 밥상을 너희에게 차려줄 때가 되었나 보다. 가자, 얘들아, 어서 저 들판으로 가자. 오갈 데 없이 서러운 마음은 정육점에 들러 고기 한 근을 사고 그걸 싸서 입에 넣어 줄 채소도 뜯어왔단다. 한 잎 한 잎 뜯을 때마다 비명처럼 흰 진액이 배어 나왔지. 그리고 이 포도주가 왜 이리 붉은지 아니? 그건 대지가 흘린 땀으로 바닷물이 짠 것처럼 엄마가 흘린 피를 한 방울씩 모은 거란다. 그러니 얘들아, 꼭꼭 씹어 삼켜라. 그게 엄마의 안창살이라는 걸 몰라도..

상사화 / 홍해리

그림 / 김 정 수 ​ ​ ​ 상사화 / 홍해리 ​ ​ 내가 마음을 비워 네게로 가듯 너도 몸 버리고 마음만으로 내게로 오라 너는 내 자리를 비우고 나는 네 자리를 채우지 오명 가명 만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가는 길이 하나이기 때문 마음의 끝이 지고 산 그늘 강물에 잠기우듯 그리움은 넘쳐넘쳐 길을 끊나니 저문저문 저무는 강가에서 보라 저 물이 울며 가는곳 멀고 먼 지름길 따라 골비한 영혼 하나 낯설게 떠도는 것을 ​ ​ ​ ​ ​

어머니는 수국화였다 / 권 정 일

그림 / 이 효 어머니는 수국화였다 / 권 정 일 ​ 그때 나는 세모시 저고리에서 달빛보다 더 선연한 바늘의 등뼈가 휘어지는 것을 보았다. ​ ​ 열 손가락 관절이 삐걱이는 소리를 들었다. 수묵화처럼 가지런한 이마가 환한 빛을 내던 토방 쪽마루를 보았다. ​ ​ 어머니 반짇고리 곁에는 내가 이름 지어준 별들이 내려와 집을 짓곤 했다. ​ 못에 찔려 피 흘리던 내 꿈들 우리집 추녀 끝에 밤마다 찾아드는 바닷소리를 들었다. ​ ​ 한 채 섬이 된 우리집 마당으로 물방울처럼 별 하나 별 둘 똑똑 떨어지는 기척이 있었다. 옛날 이야기가 섬이 되어 떠다니고 ​ ​ ​ 푸른 슬레트 지붕이 녹스는 소리마저 정겨운 여름밤이었다. ​ 흑싸리 화투패 같은 빈 껍질의 어머니 가슴에서도 녹스는 소리가 들렸다. ​ 어쩜 그것은..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 (문화일보 2021 신춘문예 시) / 남수우

그림 / 톰 안홀트 ​ ​ ​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 (문화일보 2021 신춘문예 시) / 남수우 ​ ​ ​ ​ 한 사람에게 가장 먼 곳은 자신의 뒷모습이었네 ​ 그는 그 먼 곳을 안으러 간다고 했다 ​ 절뚝이며 그가 사라진 거울 속에서 내가 방을 돌보는 동안 거실의 소란이 문틈을 흔든다 ​ 본드로 붙여둔 유리잔 손잡이처럼 들킬까 봐 자꾸만 귀가 자랐다 문밖이 가둔 이불 속에서 나는 한쪽 다리로 풍경을 옮기는 사람을 본다 ​ 이곳이 아니길 이곳이 아닌 나머지이길 중얼거릴수록 그가 흐릿해졌다 ​ 이마를 기억한 손이 거울 끝까지 굴러가 있었다 ​ 거실의 빛이 문틈을 가를 때 그는 이 방을 겨눌 것이다 번쩍이는 총구를 지구 끝까지 늘리며 제 뒤통수를 겨냥한다 해도 누구의 탓은 아니지 ​ ..

엄마의 꽃밭 / 김 광 희( 2021 신춘문예 조선일보 / 동시 )

그림 / 김 광 해​ ​ ​ ​ 엄마의 꽃밭 / 김 광 희 ( 2021 신춘문예 조선일보 / 동시 ) 종일 튀김솥 앞에 서서 오징어 감자 튀기는 엄마 밤늦게 팔에다 생감자 발라요. 그거 왜 발라? 예뻐지려고 웃으며 돌아앉아요. 얼마나 예뻐졌을까 곤히 잠든 엄마 팔 걷어 봐요. 양팔에 피어 있는 크고 작은 꽃들 튀김기름 튄 자리마다 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 동생과 나를 키운 엄마의 꽃밭 팔뚝에 가만히 얼굴을 묻으면 아릿한 꽃향기에 눈이 촉촉해져요. ​ ​ ​ * 1957년 경주 출생 한국 방송 통신대 국어국문과 졸업 * 2006 신춘문예 시 당선 * 2016 신춘문예 시조 당선 ​ ​ ​ ​

내 사랑의 날들아 / 용 혜 원

그림 / 김 정 수 내 사랑의 날들아 / 용 혜 원 내 사랑의 날들아 내 가슴에 남아 떠나가지 마라 잊혀지지도 벗겨지지도 씻겨 내려가지도 마라 너를 내 가슴에 새겨두고 녹슬지 않도록 닦고 닦아 찬란한 빛을 내고 싶다 우리 사랑의 깊이만큼 내 몸 깊숙한 속살까지 내 몸 골격까지 아파도 좋다 간이 저리도록 그리운 것이 있어야 사랑하는 맛이 난다 발이 부르트도록 기다림이 있어야 살아가는 맛이 난다 되새겨보아도 좋을 것이 있어야 여운이 있다 나는 그대 사랑으로 살아가고 싶다 내 사랑을 남기고 싶다 내 피를 물감처럼 풀어 내 사랑을 그리고 싶다 우리가 저지른 사랑은 때로는 슬퍼도 좋다 내 사랑의 날들아 내 가슴에 남아 떠나가지 마라 용혜원 시집 / 지금 사랑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

그릇 1 / 오 세 영

그림 / 황 미 숙 ​ ​ ​ 그릇 1 / 오 세 영 ​ ​ ​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 ​ 시집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 ​ ​ ​

두렵지만 머물고 싶은 시간 / 은 시 영

그림 / 박 종 식 ​ ​ ​ ​ 두렵지만 머물고 싶은 시간 / 은 시 영 ​ ​ ​ 두렵지만 머물고 싶은 시간 그건 사랑의 시간이었다. ​ 바람은 언제나 나에게 속삭임으로 진실을 말해줬지만 ​ 나는 바람의 진실을 듣지 않았다. ​ 그리고는 또 이렇게 아픈 시간들이 나를 지나간다. ​ 나의 눈물은 시가 되고 시는 그대가 되어 다시 내 안에 머문다. ​ 그리고 눈물 가득한 나에게 바람은 다시 속삭여준다. ​ 눈물, 그것은 아무나 흘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 늦은 것도 같지만 이번 바람의 위로를 나는 놓치기 싫었다. ​ ​ ​ ​ ​ ( 신춘문예 당선작 / 2021, 경인일보 ) ​ ​ ​

코뿔소 / 나 호 열

그림 / 박 삼 덕 ​ ​ ​ ​ 코뿔소 / 나 호 열 ​ ​ 둥글둥글 살아가려면 적이 없어야 한다고 하시다가도 생존은 싸늘한 경쟁이라고 엄포도 놓으시던 어머님의 옳고도 지당하신 말씀 고루고루 새기다가 어느새 길 잃어 어른이 되었다 좌충우돌 그놈의 뿔 때문에 피헤서 가도 눈물이 나고 피하지 못하여 피 터지는 삿대질은 허공에 스러진다 이 가슴에 얹힌 묵직한 것 성냥불을 그어대도 불붙지 않는 나의 피 채찍을 휘둘러도 꿈적을 않는 고집불통 코뿔소다 힘 자랑하는 코뿔소들 쏟아지는 상처를 감싸쥐고 늪지대인 서울에 서식한다 코뿔소들이 몰래 버리는 이 냄새나는 누가 코뿔소의 눈물을 보았느냐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