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 김현주
연못 위에 쓰다 / 안도현
당신을 병상에 버리고 당신은 유리창 넘어로 저를 버리고
저는 밤마다 아무도 읽지 않을 이야기를 썼죠
마당 가에 연못을 들였고요
당신이 꽃의 모가지를 따서 한 홉쯤 말려서 소포로 보내주신다면 꽂잎을 물 위에 뿌려놓고 꽃잎이 물속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바라보려 했죠
당신은 오래 죽은 척 가만히 누워 있었죠
발톱을 깎아 달라는 청을 들어주지 못했어요
연못가에 앉아 제 발등을 바라보는 동안
풀이 시들고 바람이 사나워지고 골짜기 안쪽에 눈이 몰려왔어요
당신의 장롱과 당신의 옷을 분리하고 당신의 부엌에서 당신의 수저를 떼어내고 면사무소가서 이름을 지웠지요
저는 이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어요
문법을 잊고 마음껏 미끄러질 수 있게 되었어요
쨍한 코끝으로 연못 위에 문장을 쓸 수 있게 되었어요
당신이 자신을 결박하고 돌아누워
얼음장을 깔아준 덕분이죠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아서 좋은 단어들
의미 없이 녹아버릴 돌맹이들
연못을 덮은 얼음장 위에 얼음장을 덮은 눈 위에
출처 / 한국 시학, 2032 봄호
* 블친님들 ^^ 개인적인 사정으로 5일 동안 답방이 어렵습니다.
매일 오셔서 시 한 편 읽고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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