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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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냄새 / 김소월

그림 / 자심 여자 냄새 / 김소월 푸른 구름의 옷 입은 달의 냄새. 붉은 구름의 옷 입은 해의 냄새. 아니, 땀 냄새, 때 묻은 냄새. 비에 맞아 축업은 살과 옷 냄새. 푸른 바다..... 어지러운 배..... 보드라운 그리운 어떤 목숨의 조그마한 푸릇한 그무러진 영 어우러져 빗기는 살의 아우성..... 다시는 장사 지나간 숲속의 냄새. 유령 실은 널뛰는 뱃간의 냄새. 생고기의 바다의 냄새. 늦은 봄의 하늘을 떠도는 냄새. 모래 두던 바람은 그물안개를 불고 먼 거리의 불빛은 달 저녁을 울어라. 냄새만은 그 몸이 좋습니다. 냄새만은 그 몸이 좋습니다. 시집 / 김소월 시화집

목련 / 이대흠

그림 / 신종식 ​ ​ ​ ​ 목련 / 이대흠 ​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면 목련이라 해야겠다 애써 지우려 하면 오히려 음각으로 새겨지는 그 이름을 연꽃으로 모시지 않으면 어떻게 견딜 수 있으랴 한때 내 그리움은 겨울 목련처럼 앙상하였으나 치통처럼 저리 다시 꽃 돋는 것이니 그 이름이 하 맑아 그대로 둘 수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냥 푸른 하늘로 놓아두고 맺히는 내 마음만 꽃받침이 되어야지 목련꽃 송이마다 마음을 달아두고 하늘빛 같은 그 사람을 꽃자리에 앉혀야지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으로 울지 않겠냐고 흔들려도 봐야지 또 바람에 쓸쓸히 질 것이라고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 ​ ​ ​ ​ 이대흠 시집 /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 ​ ..

홈커밍데이 / 이진우

그림 / 김제순 ​ ​ ​ ​ ​ 홈커밍데이 / 이진우 ​ ​​ ​ 이름을 부른 것도 아닌데 여름이 온다 ​ 어른이 되기도 전에 벌써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감각들이 유빙처럼 떠내려갔지 애인을 기다리며 마시는 커피의 얼음이 녹는 속도라든지 그 사람과 이별한 후 마시게 될 맥주의 온도라든지 우리는 우리의 이마와 코끝이 얼마나 가까운지도 알지 못했지 앨범에 넣어둔 사진이 눅눅해지는 건지도 몰랐지 그때 네가 입고 있던 반팔 티는 무슨 색이었나 벽지에 말라붙은 모기의 핏자국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장마처럼 햇볕이 쏟아진다 운동장엔 새로 자란 그림자들이 무성하다 다음 여름도 그랬으면 좋겠다 여름이 오는데 여름에 죽은 친구의 얼굴이 기억나질 않는다 ​ ​ (2023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 ..

뿌리에게 / 나희덕

그림 / 길현수 뿌리에게 /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박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서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 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레드 와인 / 고미경​​

그림 / 기용 ​ ​ ​ 레드 와인 / 고미경​ ​ ​ ​ 심장이 기울어지는 날들이에요 혼자 술 붓는 밤이면 밀바의 목소리에서 서랍 속의 바다를 꺼내 보다가 먼 지중해까지 흘러가요 ​ 올리브나무 우거진 숲 새가 혼자 울고 있어요 나목의 꼭짓점이 날카로워져요 ​ 추운 별들이 숲으로 흘러들어가고 새의 날개가 곱아들면 밀바의 노래는 저음으로 타올라요 ​ 올리브 숲으로 날아가 밤을 견디는 새 ​ 기울어진 바다가 흐느끼다가 붉게 출렁거릴 때 ​ 새는 백척간두에서 소스라치듯 날아올라요 ​ ​ ​ ​ 고미경 시집 / 칸트의 우산 ​ ​ ​ ​ ​

찬밥 / 문정희​​

그림 / 성기혁 ​ ​ ​ 찬밥 / 문정희​ ​ ​아픈 몸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는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있어 일 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는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 훑어 누가 남긴 무 조각에 생선 가시를 핥고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락거리던 그 손이 그리워 나 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를 만난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 ​ ​ ​ 문정희 시집 /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 ​ ​ ​ ​

칸트의 우산 / 고미경

그림 / 김정수 ​ ​ ​ 칸트의 우산 / 고미경​ ​ ​ 과거의 시간 속으로 비가 내려요 칸트는 우산을 가지고 다닌 적이 없었죠 한 번도 비의 시간을 쓴 적이 없었으니까요 햇빛이 늙어가는 시간에 산책을 하면 달이 피어나는 시간 쪽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우산을 건네주었죠 하지만 산정의 교회당에서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도 우산을 편 적이 없었어요 ​ 칸트의 시간 속에는 ​ 우산이 없었기 때문이죠 길에 버려진 상자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는데 그 안의 시간과 밖의 시간 사이에만 비가 내리고 있었기에 칸트는 종소리를 듣지 못했죠 비는 과거의 발자국만 밟고 다니니까요 ​ 칸트는 언제쯤 우산을 펼 수 있을까요 ​ ​ ​ 고미경 시집 / 칸트의 우산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