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봄의 시인 / 이 어 령

푸른 언덕 2021. 3. 9. 21:59

그림 : 영 희

봄의 시인 / 이 어 령

 

꽃은 평화가 아니다.

저항이다.

빛깔을 갖는다는 것,

눈 덮인 땅에서 빛깔을 갖는다는 것

그건 평회가 아니라 투쟁이다.

검은 연기 속에서도

향기를 내뿜는 것은

생명의 시위.

부지런한 뿌리의 노동 속에서

쟁취한

땀의 보수.

벌과 나비를 위해서가 아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가 아니다.

꽃은 오직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서

색채와 향기를 준비한다.

오직 그럴 때만 정말 꽃은 꽃답게 핀다.

꽃은 열매처럼 먹거나

결코 씨앗처럼 뿌려 수확을 얻지는 못한다.

다만 바라보기 위해서

냄새를 맡기 위해서 우리 앞에 존재한다.

그래서 봄이 아니라도

마음이나 머리의 빈자리 위에 문득

꽃은 핀다.

시인의 은유로 존재하는 꽂은

미소하고 있는 게 아니다

가끔 분노로 타오른다.

나비도 벌도 오지 않는 공장 굴뚝 밑에

한 송이 꽃이 피어있는 우연!

꽃이 있어 우리는 태곳적 생명의 기억을

갖고 산다.

꽃은 시인의 은유로

졌다가도 다시 우리 곁에 돌아와

슬그머니 핀다.

 

시집 :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이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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