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방랑의 엘레지 / 쉼보르스카

그림 / 이은실 방랑의 엘레지 / 쉼보르스카 모든 것이 내 것이지만, 내 소유는 아니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내 것이지만, 기억으로 소유할 순 없다. 가까스로 기억을 떠올린들 불확실할 뿐. 머리를 잘못 맞춘 여신의 조각상처럼. 사모코프에 내리는 비는 멈출 줄 모른다. 파리의 정경은 루브르에서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점까지 가물가물 희미하게 사라져간다. 생마르탱의 가로수 길, 그곳의 계단은 갈수록 페이드아웃. 내 기억 속에서 '다리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고작 다리 한 개와 반쯤 남은 또 다른 다리의 영상. 가여운 웁살라에는 무너진 대성당의 잔해. 소피아에는 얼굴없이 몸통만 남은 가여운 무희가 있다 눈동자 없는 그의 얼굴 따로, 동공 없는 그의 눈동자 따로, 고양이의 동공도 따로. 새롭게 재건된 협곡..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 이예진

그림 / 이소윤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 이예진 금값이 올랐다 언니는 손금을 팔러갔다 엄마랑 아빠는 이제부터 따로 살 거란다 내가 어릴 때,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언니의 숙제를 찢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니도 화가 나서 엄마의 가계부를 찢었고 엄마는 아빠의 신문을 찢고 아빠는 달력을 찢다가, 온 세상에 찢어진 종이가 눈처럼 펄펄 내리며 끝난다 손금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집에 남고 싶은 것은 정말로 나 하나뿐일까? 언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더는 찢을 것이 없었다 눈이 쌓이고 금값이 오르고 검은 외투를 꽁꽁 여민 사람들이 거리를 쏘아 다녔다 엄마는 결국 한 돈짜리 목걸이를 한 애인을 따라갔지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오겠다고 했다 따로 따로 떨어지는 ..

낮은 곳으로 / 이정하

그림 / 이효선 ​ ​ ​ 낮은 곳으로 / 이정하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든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정하 시집 /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 ​ ​ ​

초봄의 뜰 안에 / 김수영

그림 / 다비드자맹 ​ ​ ​ ​ 초봄의 뜰 안에 / 김수영 ​ ​ 초록의 뜰 안에 들어오면 서편으로 난 난간문 밖의 풍경은 모름지기 보이지 않고 ​ 황폐한 강변을 영혼보다도 더 새로운 해빙의 파편이 저 멀리 흐른다 ​ 보석 같은 아내와 아들은 화롯불을 피워 가며 병아리를 기르고 짓이긴 파 냄새가 술 취한 내 이마의 신약神藥처럼 생긋하다 ​ 흐린 하늘에 이는 바람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른데 옷을 벗어 놓은 나의 정신은 늙은 바위에 앉은 이끼처럼 추워라 ​ 겨울이 지나간 밭고랑 사이에 남은 고독은 신의 무재주와 사기라고 하여도 좋았다 ​ ​ ​ 시집 / 너에게 주고픈 아름다운 시 ​ ​ ​ ​ ​

부치지 않은 편지 / 정호승

그림 / 정규설 ​ ​ ​ ​ 부치지 않은 편지 / 정호승 ​ ​ 풀잎은 쓰러져서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라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 ​ ​ ​ 시집 / 너에게 주고픈 아름다운 시 ​ ​ ​ ​ ​

별 하나 / 도종환

그림 / 다비드자맹 별 하나 / 도종환 흐린 차창 밖으로 별 하나 따라온다 참 오래되었다 저 별이 내 주의를 맴돈 지 돌아보면 문득 저 별이 있다 내가 별을 떠날 때가 있어도 별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저 별처럼 있고 싶다 상처받고 돌아오는 밤길 돌아보면 문득 거기 있는 별 하나 괜찮다고 나는 네 편이라고 이마를 씻어주는 별 하나 이만치의 거리에서 손 흔들어주는 따뜻한 눈빛으로 있고 싶다 시집 / 너에게 주고픈 아름다운 시

​일요일에 심장에게 / 쉼보르스카

그림 / 조영진 ​ ​ ​ ​ 일요일에 심장에게 / 쉼보르스카 ​ ​ ​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보채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아서. 타고난 성실함과 부지런함에 대해 그 어떤 보상도, 아첨도 요구하지 않아서. ​ 너는 1분에 70번의 공로를 세우고 있구나. 네 모든 수축은 마치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는 조각배를 바다 한가운데로 힘차게 밀어내는 것 같구나. ​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한 번, 또 한 번, 나를 전체에서 분리시켜줘서, 심지어 꿈에서조차 따로 있게 해줘서. ​ 내가 늦잠을 자지 않고 비행시간을 맞출 수 있게 해줘서, 날개가 필요 없는 비행 말야. ​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내가 또다시 잠에서 깨어날 수 있게 해주어서. 비록 오늘은 일요일, 안식을 위해 마련된 특별한 날이지만, 내 갈비뼈..

살아 있어서 감사 / 김재진​

그림 / 홍종구 ​ ​ ​ ​ 살아 있어서 감사 / 김재진​ ​ ​ ​ 안 난 줄 알았는데 새순이 나네. 다 죽은 줄 알았는데 파랗게 산천을 물들이네. 아픈 세상살이 이와 같아서 바닥인 줄 알았는데 더 내려가네. 다내려간 줄 알았는데 창이 뚫리네. 겨우 열린 창 틈으로 먼 하늘 보며 때로는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감사, 살아 있어서 감사 ​ ​ ​ ​ 김재진 시집 /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 * 블친님들 ^^ 개인적인 사정으로 5일 동안 답방이 어렵습니다. 매일 오셔서 시 한 편 읽고 가시기 바랍니다. ​ ​ ​​ ​ ​ ​ ​ ​ ​ ​

사랑을 묻거든 / 김재진​​

그림 / 국중길 ​ ​ ​ ​ 사랑을 묻거든 / 김재진​ ​ ​ ​ 사랑을 묻거든 없다고 해라. 내 안에 있어 줄어들지 않는 사랑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니 누가 사랑했냐고 묻거든 모르겠다고 해라. 아파할 일도 없으며 힘들어할 일도 없으니 누가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리거든 나를 적시며 흘러가버린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강물이라고 해라. ​ ​ ​ 김재진 시집 /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 * 블친님들 ^^ 개인적인 사정으로 5일 동안 답방이 어렵습니다. 매일 오셔서 시 한 편 읽고 가시기 바랍니다. ​ ​ ​ ​ ​

연못 위에 쓰다 / 안도현​​

그림 / 김현주 ​ ​ ​ 연못 위에 쓰다 / 안도현​ ​ ​ 당신을 병상에 버리고 당신은 유리창 넘어로 저를 버리고 ​ 저는 밤마다 아무도 읽지 않을 이야기를 썼죠 ​ 마당 가에 연못을 들였고요 당신이 꽃의 모가지를 따서 한 홉쯤 말려서 소포로 보내주신다면 꽂잎을 물 위에 뿌려놓고 꽃잎이 물속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바라보려 했죠 ​ 당신은 오래 죽은 척 가만히 누워 있었죠 발톱을 깎아 달라는 청을 들어주지 못했어요 ​ 연못가에 앉아 제 발등을 바라보는 동안 풀이 시들고 바람이 사나워지고 골짜기 안쪽에 눈이 몰려왔어요 당신의 장롱과 당신의 옷을 분리하고 당신의 부엌에서 당신의 수저를 떼어내고 면사무소가서 이름을 지웠지요 ​ 저는 이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어요 문법을 잊고 마음껏 미끄러질 수 있게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