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이혼 고백장 / 나 혜 석

푸른 언덕 2021. 5. 26. 18:25

조선의 유식 계급 남자 사회는 불쌍합니다.

 

애매한 요릿집에나 출입하며 죄 없는 술에 투정을

다하고, 몰상식한 기생을 품고 즐기나 그도 역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유식 계급 여자, 즉 신 여성도 불쌍하외다.

 

아직도 봉건시대 가족제도 밑에서 자라나고

집가고 살림하는

 

그들의 내용의 복잡이란 말할 수 없이 난국이외다.

 

조선 남성 심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종종 방종한 여성이 있다면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 말살시키고 저작시키는 일이

불소하외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

 

<이혼 고백장-청구 씨에게>,<삼천리> 1934.9

 

나혜석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원조 신여성이다.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이다"를 외쳤던 원조 신여성

나혜석!

최초, 미술, 철학, 스포츠 등 어떤 분야든 최초를

좋아했던 신여성

미술 외에도 다방면으로 선구자였다.

조선 여성 최초로 세계 일주를 100년 전에 했다.

시흥 군수를 지낸 아버지 밑에서 부잣집 딸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다.

1913년 열여덟의 혜석은 일본 도쿄여자미술

전문학교 서양학과에 입학을 한다.

1910년대에 조선에 서양화를 최초로 소개한 선구자

1913년 1918년까지 약 5년간의 유학 생활의

체험 속에서 혜석은 조선사회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를 명확히 알게 됩니다.

99%의 사람들이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그때, 혜석은 전근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신여성이 되기로 결심을 합니다.

이를 위해서 혜석이 선택한 것은 붓과 펜이었습니다.

3.1운동에도 관여를 합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된

3.1만세 운동에도 참여합니다.

혜석과 신여성들이 치안 문란 혐의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1917년 첫사랑 최승구의 사망 이후에 실의에 빠져

있던 혜석에게 오빠인 나경석이 당시 교토제국 대학

법학과 학생 김우영을 소개시켜 줍니다.

1년 전에 사별한 결혼 유경험자이며 자식도 있지만

우영은 혜석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합니다.

혜석이 옥중 후유증과 함께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자 진심을 다하는 우영에게 마음 문을 엽니다.

다만 우영의 청혼을 받아들이기 전 다음과 같은

조건을 달죠.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주시오.

여기서 더해 신혼여행으로 죽은 애인 최승구의 묘에

가서 비석을 세워 달라고 합니다.

이로써 둘은 1920년 결혼하게 됩니다.

결혼 후 얼마 안 가서 혜석은 임신을 하게 됩니다.

출산, 육아, 가사, 붓과 펜의 일까지 원조 워킹맘이

탄생을 합니다.

쉽지 않은 워킹맘의 길, 혜석은 선구자로서의 의지를

불태우며 신여성의 길을 개척해갑니다.

1921년 아기를 밴 만삭의 몸으로 작품을 준비하고

경성 한복판에서 무려 70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유화 개인전을 엽니다.

전시가 열린 이틀간 무려 5천여명의 관람객을 동원

합니다.

1922년 제1회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세계 일주의 기회가 찾아 온 것은 남편 우영이 만주

에서 부영사 임무를 마친 것에 대한 일본 외무성에서

포상을 준 것입니다.

혜석은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이미 3아이와 태어난 지 몇 개월 된 젖먹이가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삼 남매를 시댁에 맡겨놓고 떠나기로 결심을

합니다.

꿈만 같은 세계 일주는 그렇게 실행됩니다.

미술관을 둘러보면서 14세기 르네상스 원형부터

20세기 동시대의 실험적인 뒤샹의 작품까지 두루

섭렵 합니다.

세계 여행은 "생애 최대의 황금기"입니다.

서양이라는 신세계에 몸을 담고 모든 탈을 벗고

자유로운 영혼이 됩니다.

법학 공부를 위해서 남편 우영은 베를린으로 가게

되고 혜석은 홀로 남아서 미술 공부를 합니다.

우영은 그의 친구인 최린에게 아내의 파리 생활을

부탁합니다.

최린은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대표

중 한 명으로 천도교 신파의 수장이었습니다.

예술에 조예가 깊어서 대화가 잘 통해서 일까요?

체린의 유혹을 혜석은 막지 못합니다.

이렇게 둘의 관계는 파리 유학생 사이에 퍼져나가

"나혜석은 최린의 작은댁"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죠.

우영은 이때 혜석에게 "다시는 최린을 만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혜석도 그러겠다고 약속을 하지만 이미 부부의

신뢰는 무너져 버린 상황입니다.

그녀의 <자화상>에서 느껴지는 깊은 근심과 슬픔을

담고 있는 이유입니다.

큰 포부를 안고 떠났던 세계여행

부부에게 멋진 추억이 될 수 있었던 그 여행은

치유되기 어려운 멍으로 남게 됩니다.

1929년 우영은 한국에 오자마자 혜석을 시골에

두고 홀로 서울에 올라가서 변호사

개업을 합니다.

사실상 별거 상태에 이른 거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 발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한국을 덮칩니다.

그간 모았던 돈은 세계 여행으로 모두 써버리고

남편 변호 일의 수입도 별로 없던 상황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난을 모르고 살았던 혜석은

하루아침에 끼니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죠.

여기서 혜석은 다시 최린을 떠올립니다.

당시 최린은 천도교의 수장으로 국내에서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죠.

혜석은 최린에게 경제적 도움을 구할 요량으로

"다시 사귀기를 바란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맙니다.

그런데 이 편지는 최린의 측근을 통해서 "평생을

당신에게 맡기겠다"라는 내용으로 왜곡되어

우영의 귀에 들어가고, 결국 결혼 생활은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결국 한 가닥의 자존심마저 무너져 내린 우영은

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합니다.

혜석의 편지 내용은 오해이며 자식을 위해서라도

이혼을 말자고 애원을 하지만, 우영은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결국 혜석은 자녀 양육권도,

재산 분할도 없이 이혼 후에 거리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어느덧 서른여섯이 된 혜석, 입술을 콱 깨물고

과거와 단절하기로 결심합니다.

당당한 독신 여성으로서 사회적 경제적으로 자립을

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오직 자신의 노력과 근면만으로 시대를 정면 돌파

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불굴의 의지로 작업에 몰두하고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다시 준비하지만 그녀가 묵고 있는 숙소에

불이 나고 작업한 30여 점의 작품이 불에 타버립니다.

칠전팔기! 그녀는 다시 일어나서 전 재산을 털어

그녀의 마지막 꿈인 "여자 미술 학사"를 엽니다.

학교를 만들고 싶은 포부를 품고 문은 엽니다.

서양화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 고가의 미술 재료비를

충당하면서 배우고 싶어 할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학사는 1년도 안 돼서 폐업을 합니다.

재기를 위해서 노력을 했지만 사회가 그녀에게 준

것은 오직 낙인과 낙오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사회를 향한 분노와 혐오에 물든 펜촉을

종이 위에 올리고 맙니다.

1934년 나이 서른아홉, 문예지 <삼천리>에

제목부터 심상찮은 <이혼 고백서>을 기고합니다.

남편 김우영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입니다.

남편을 비난하기 보다는 오히려 조선사회의

구태의연한 인식과 인습의 문제점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블친 님들께 한 세기를 앞서간 우리나라 죄초의

신여성을 소개해 드리고 싶어서 몇 자 옮겨 봅니다.

저는 미술 전공자가 아니어서 나혜석의 미술 세계에

초점을 두고 글을 요약한 것이 아니라 한 여성으로서

기구한 삶을 세상과 맞서 싸워 나간 불굴의 신여성

나혜석을 조명하고 싶어서 두서없이 몇 자 적었습니다.

출처 : <방구석 미술관 2> 나혜석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