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손정희
봄날은 간다 / 최금진
사슴 농장에 갔었네
혈색 좋은 사과나무 아래서
할아버지는 그중 튼튼한 놈을 돈 주고 샀네
순한 잇몸을 드러내며 사슴은 웃고 있었네
봄이 가고 있어요, 농장주인의 붉은 뺨은
길들여진 친절함을 연방 씰룩거리고 있었네
할아버지는 사슴의 엉덩이를 치며 흰 틀니를 번뜩 였네
내 너를 마시고 回春할 것이니
먼저 온 사람들 너덧은 빨대처럼 생긴 주둥이를
컵에 박고 한잔씩 벌겋게 들이켜고 있었네
사과나무꽃 그늘이 사람들 몸속에 옮겨 앉았네
쭉 들이켜세요, 사슴은 누워 꿈을 꾸는 듯했네
사람들 두상은 모두 말처럼 길쭉해서 어떤 악의도 없었네
누군가 입가를 문질러 닦을 때마다
꽃잎이 묻어났네, 정말 봄날이 가는 동안
뿔 잘리고 유리처럼 투명해진
사슴의 머리통에 사과나무 가지들이 대신 걸리고
할아버지 얼굴은 통통하게 피가 올라 출렁거려었네
늙은 돼지 몇마리를 몰고 나와 배웅하는 농장 주인과
순록떼처럼 킁킁 웃으며 돌아가는 사람들 뒤
사과꽃잎에 빗물자국 번지며 봄날이 가고 있었네
최금진 시집 / 새들의 역사
'문학이야기 > 명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암동 / 박준 (8) | 2023.07.06 |
---|---|
길 떠난 그대여 / 황청원 (24) | 2023.07.03 |
한글 공부 / 박수진 (31) | 2023.06.29 |
소주병 / 공광규 (24) | 2023.06.28 |
양철 지붕과 봄비 / 오규원 (25) | 2023.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