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늙어가는 첫사랑 애인에게 / 최금진

푸른 언덕 2022. 12. 7. 17:42

 

그림 / 한영숙

 

 

 

늙어가는 첫사랑 애인에게 / 최금진

 

 

주인 없는 황량한 뜰에서 아그배나무 열매들은 저절로 떨어지고

내가 만든 편견이 각질처럼 딱딱하게 손끝에서 만져질 때

아침엔 두통이 있고, 점심땐 비가 내리고

밤새 달무리 속을 걸아가

큰 눈을 가진 개처럼 너의 불 꺼진 창문을 지키던 나는 이제 없다

그때 너와 맞바꾼

하나님은 내 말구유 같은 집에는 다신 들르시질 않겠지

나는 어머니보다 더 빨리 늙어가고

아무리 따라하려 해도 안되는 행복한 흉내를 거울은 조용히 밀어낸다

혼자 베란다에 설 때가 많고, 너도

남편 몰래 담배나 배우고 있으면 좋겠다

냄새나는 가랑이를 벌리고 밑을 씻으며

습관적으로 욕을 팝콘처럼 씹어 먹고

아이의 숙제를 끙끙대며 어느 것이 정답인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너무 많은 정답과 오답을 가진 머저리, 빈껍데기 아줌마가 되어

네 이름을 새겨놓았던 그 아그배나무 아래로

어느날 홀연히 네가

툭, 툭, 내 발 앞에 떨어져내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세상에 종말이 오겠지

위대한 경전이 지구를 돌아 제자리로 올 때까지 걸린 시간

사랑한 자들이 한낱 신의 노리개였음을 깨닫는 데 걸린 시간

트럭이 확 몸을 밀고 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던 날들이었다

뽀얗게 분을 바르고 우는 달을 보면서

여자들은 잃어버린 자신의 청동거울을 떠올리고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술을 끊으라는 의사의 조언은 거짓이다

나는 이제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하나님은 아그배나무 속에 살지 않고

그 붉은 열매 속에도 없고, 그 열매를 따 담은 내 주머니에도 없으니

그런가, 너도 나처럼 무중력을 살고 있는가

함박눈 내리던 그날 내 손에 잠시 앉았다 날아간 새처럼

너도 이 밤에 젖은 휴지처럼 풀어진 날개를 접고 앉아

사랑과 슬픔을 혼동하고 있는가

여기가 지옥이 아니라면 분명 꿈속일 것인데

내가 꾸는 꿈엔 나비와 꽃과 노래가 없으니

사랑이 없는 시간, 사랑이 없어도 아침이 오는 시간

주인 없는 뜰에서 아그배나무 열매는 아픈 목젖처럼 빨갛게 익어가고

하나님은 더듬거리며 너를 찾다가 나와 함께 어두워져

마침내 악수를 나누고 헤어진단다

 

 

 

*최금진 시집 /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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