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유리의 기술 / 정병근

푸른 언덕 2022. 9. 27. 19:19

 

그림 / 김환기

 

 

 

 

 

유리의 기술 / 정병근

 

 

 

유리창에 몸 베인 햇빛이

피 한 방울 없이 소파에 앉아 있다

고통은 바람인가 소리인가

숨을 끊고도, 저리 오래 버티다니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자

햇빛은 비로소 신음을 뱉으며 출렁인다

고통은 칼날이 지나간 다음에 찾아오는 법

회는 칼날의 맛이 아니던가

깨끗하게 베인 과일의 단면은 칼날의 기술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풍경의 살을 떠내는

저 유리의 기술,

머리를 처박으며 붕붕거리는 파리에게

유리는 불가해한 장막일 터,

훤히 보이는 저곳에 갈 수 없다니!

이쪽과 저쪽, 소리와 적막 그 사이에

통증 없는 유리의 칼날이 지나간다

문을 열지 않고도 안으로 들이는 단칼의 기술,

바람과 소리가 없다면 고통도 없을 것이다

 

 

 

 

*시집 / 번개를 치다 <문학과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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