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놓치다 / 송 영 희

푸른 언덕 2020. 11. 28. 16:29

 

 

 

놓치다 / 송 영 희

 

김장 배추 모종을, 일주일이나 넘기고 심었다

핑계가 왜 없으랴

아픈 이의 병간호 때문이라고

그때 위중한 시기였다고

뒤늦은 까닭을 땅에게 하늘에게 고하며

백여 포기를 꼼꼼하게 비닐 구멍마다 물 듬뿍 주며 심었다

 

배추가 실하게 자라긴 잘 자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무농약으로 적당히 벌레도 먹고

배추흰나비도 날아오고

이파리 색깔도 보기 좋게 푸르렀다

 

허나 옹이가 생기지를 않는 것

시간이 지나도 그 결구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

속이 안 차는 빈방이었다

두둥실 떠오르는 달이 만월이 되어야

우주의 기운이 성하듯

아 그 절정의 에로틱한 꽃잎들이 기다려도

기다려도 생기지 않는 거였다

 

후회스럽고 애가 타도

때를 놓친

그 한끝 때문에, 천기 때문에

우주를 감싸고 있는

분홍빛 그 신방의 불이 켜지지 않는 것

가까운 이들이 물었다

그이는 어떠니 아직도 병 중이니?

 

송영희 시집 <우리는 점점 모르는 사이가 되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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