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다 / 송 영 희
김장 배추 모종을, 일주일이나 넘기고 심었다
핑계가 왜 없으랴
아픈 이의 병간호 때문이라고
그때 위중한 시기였다고
뒤늦은 까닭을 땅에게 하늘에게 고하며
백여 포기를 꼼꼼하게 비닐 구멍마다 물 듬뿍 주며 심었다
배추가 실하게 자라긴 잘 자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무농약으로 적당히 벌레도 먹고
배추흰나비도 날아오고
이파리 색깔도 보기 좋게 푸르렀다
허나 옹이가 생기지를 않는 것
시간이 지나도 그 결구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
속이 안 차는 빈방이었다
두둥실 떠오르는 달이 만월이 되어야
우주의 기운이 성하듯
아 그 절정의 에로틱한 꽃잎들이 기다려도
기다려도 생기지 않는 거였다
후회스럽고 애가 타도
때를 놓친
그 한끝 때문에, 천기 때문에
우주를 감싸고 있는
분홍빛 그 신방의 불이 켜지지 않는 것
가까운 이들이 물었다
그이는 어떠니 아직도 병 중이니?
송영희 시집 <우리는 점점 모르는 사이가 되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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