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가시

푸른 언덕 2020. 3. 9. 22:01


가시

                                                    정호승

지은 죄가 많아

흠뻑 비를 맞고 봉은사에 갔더니

내 몸에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손등에는 채송화가

무릎에는 제비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야윈 내 가슴에는 장미가 피어나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에 가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토록 가시 많은 나무에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생각하라고

장미는 꽃에서 향기가 나는게 아니라

가시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라고

가장 날카로운 가시에서 가장 멀리 가는 향기가 난다고

장미는 시들지도 않고 자꾸자꾸 피어나

나는 봉은사 대웅전 처마 밑에 앉아

평생토록 내 가슴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

가시를 힘껏 뽑아내려고 하다가

슬며시 그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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