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푸른 언덕 2020. 3. 7. 22:43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김경주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보고서야 알았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카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 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네, 그 속에서 하늘하늘

한 팬티 한 장 어머니

볼에 문질러 보네, 안감이 붉어지도록

손끝으로 비벼보시던 꽃무늬가

어머니를 아직껏 여자로 살게 하는 무늬였음을

오늘은 그 적멸이 내 볼에 어리네.

 

어머니 몸소 세월로 증명했듯

삶은, 팬티를 다시 입고 시작하는 순간순간이었네.

사람들이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팬티들은 싱싱했네.

웬만해선 팬티 속 이 꽃들은 시들지

않았네.

빨랫줄에 하나씩 열리는 팬티들로

뜬 눈송이 몇 점 다가와 물드네.

쪼글쪼글한 꽃 속에서 꽃물이 똑똑

떨어지네.

눈덩이만한 나프탈렌과 함께

서랍 속에서 일생을 수줍어하곤 했을

어머니의 오래된 팬티 한 장

푸르스름한 살 냄새 속으로

그 드물고 정하다는 햇볕이 포근히

엉겨 붙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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