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발코니의 시간 / 박은영

푸른 언덕 2022. 6. 1. 18:38

 

그림 / 박순희

 

 

 

 

발코니의 시간 / 박은영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허공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통유리 너머의 당신은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아슬아슬 이우는 봄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있습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하얀 유골 한 구가 바람의 멍든 발을 매만져 준다

해 저무는 발코니,

세상이 한눈에 보인다

 

 

 

박은영 시집 /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박은영>

*전남 강진 출생

*2018 문화일보 신춘문예 <발코니의 시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인디고> 시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