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거지 / 뚜르게네프 Turgenev

푸른 언덕 2022. 1. 16. 18:30

그림 / Alessandro Tamponi

거지 / 뚜르게네프 Turgenev

거리를 걷고 있노라니 늙은 거지 하나가 나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눈물어린 충혈된 눈, 파리한 입술, 다 해진 옷,

더러운 상처, 오오, 가난은 어쩌면 이렇게 처참히 이 사람을 갉아먹는 것일까!

그는 신음하듯 동냥을 청한다.

나는 호주머니를 모조리 뒤져 보았다.

지갑도 없다. 시계도 없다. 손수건마저도 없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거지는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게 내민 그 손은 힘없이 흔들리며 떨리고 있다.

당황한 나머지 나는 힘없이 떨고 있는 그 더러운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용서하시오, 형제,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려"

거지는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파리한 두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스쳤다.

그리고 그는 나의 싸늘한 손가락을 꼭 잡아주었다.

"괜찮습니다, 형제여" 하고 속삭였다.

"그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것도 역시 적선이니까요"

나는 깨달았다. 나도 이 형제에게서 적선을 받았다는 것을.

 

뚜르게네프 Turgenev

(1818년~1883년, 러시아 작가)

 

김율도 시집 / 가끔은 위로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