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 이규리

푸른 언덕 2021. 12. 14. 18:17

그림 / 서 순 태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 이규리

 

 

공원 안에 있는 살구나무는 밤마다 흠씬 두들겨맞는다

이튿날 가보면 어린 가지들이 이리저리 부러져 있고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가 깨진 채 떨어져 있다

새파란 살구는 매실과 매우 흡사해

으슥한 밤에 나무를 때리는 사람이 많다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것이다

키 큰 내가 붙어 다닐 때 죽자고 싫다던 언니는

그때 이미 두들겨맞은 게 아닐까

키가 그를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평생

언니를 때린 건 아닐까

 

살구나무가 언니처럼 무슨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매실나무도 제 딴에 이유를 따로 남기지 않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도 서로 아프고 서로 미안해서,

가까운 것들을 나중에 어느 먼 곳에서 만나면

미운 정 고운 정, 얼싸안고 울지 않을까

‘이 나무열매는 매실이 아닙니다’라고 적어 달앗다가

‘이 나무는 살구나무입니다’라고 바꿔 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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