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언덕위의 붉은 벽돌집

푸른 언덕 2020. 2. 26. 21:08


  언덕위의 붉은 벽돌집 / 손택수

       
 연탄이 떨어진 방, 원고지 붉은 빈칸 속에 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들 듯 이불 돌돌 아랫도리에 손을 데우며,
 창문 너머 금 간 하늘 아래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전학 온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보, 고, 싶, 다, 보, 고, 싶, 다 눈이 내리던 날들  
 
 벽돌 붉은 벽에 등을 기대고 싶었다
 불의 뿌리에 닿고 싶은 하루하루 햇빛이 묻어 놓고 간 온기라도 여직 남아 있다는 듯
 눈사람이 되어, 눈사람이 되어 만질 수 있는 희망이란 벽돌 속에 꿈을 수혈하는 일
 
  만져도 녹지 않는, 꺼지지 않는 불을
 
  새벽이 오도록 빈 벽돌 속에 시를 점화하며, 수신자 불명의 편지만 켜켜이 쌓여가던 세월,
 그 아이는 떠나고 벽돌집도 이내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가슴속 노을 한 채 지워지지 않는다
 내 구워낸 불들 싸늘히 잠들고 비록 힘없이 깨어지곤 하였지만
 
 눈 내리는 황금빛 둥지 속으로 새 한 마리 하염없이 날아가고 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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