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디의 말보다 한 송이 장미가 /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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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신사역에서 지하철을 타려고 가다가 어떤 젊은 남녀를 보았습니다.
- 여학생이 개찰구 표를 넣은 다음 남학생을 쳐다보면서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는데,
남학생이 "선영아!" 하고 불렀어요.
- 그러자 여학생은 "서로 인사해놓고 왜 불러?"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다 그녀는 남학생 쪽으로 갔습니다.
- 이윽고 그 남학생은 감추어 놓았던 한 송이의 장미꽃을 내밀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눈만 쳐다보면서 주었더니,
- 갑자기 선영이의 얼굴에 웃음꽃이 막 피어나면서
아무 말 없이 장미꽃을 받아든 채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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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학생은 기분이 좋은지 입이 벌어지는 게 보였습니다.
남자가 선영이한테 장미꽃을 전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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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했을 때와 말 없이 장미꽃을 건네줬을 때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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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했을 때는 산문의 세계고 말없이 장미꽃을 건네줬을 때는 운문의 세계, 즉 시의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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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미꽃을 건네주는 행위 자체는 은유(隱喩)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것에 대한 은유죠.
- 그리고 그 장미는 하나의 은유물입니다.
그런 은유의 행위를 여러분들의 일상 속에서 누구나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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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바로 은유의 세계이고 시의 바탕이 되는 세계입니다.
건물을 뒤덮고 있는 담쟁이와 같은 것이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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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에 쏟아지는 소나기가 바로 시입니다.
만일 바다가 보이는 곳에 창이 하나도 없는 곳에 있으면서,
- 바닷가에 있는 건 무의미합니다.
우리가 바닷가에 있을 때, 바다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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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모두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십시오.
자신의 마음에 들어와 있는 사물이 말을 하게 할 때 시심은 무르익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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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의 꽃은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