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자작시

당신의 숨 한 번 / 이 효

푸른 언덕 2022. 12. 9. 15:27

 

해설

 

 

‘숨’과 ‘쉼’의 풍경을 읽다

나호열 (시인 · 문학 평론가)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보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하나는 기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며, 또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기적奇跡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한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인과의 법칙을 넘어서서 이루어지는 것, 어떤 절망적 상황이 순식간에 극복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기적이 필요하지 않은 평온한 삶이다. 기적이 요구되지 않는 삶, 언제든 쉬고 잠잘 수 있는 집이 있고, 언제든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넉넉한 양식糧食이 비축되어 있는, 어찌 보면 판에 박힌 쳇바퀴를 돌리는 삶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생존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많은 시간의 노동을 감수한다. 단언컨대 안락한 노동은 없으며, 성실한 노동이 반드시 안락한 삶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다시 기적의 의미를 희망으로 바꿔본다면 어떨까? 희망은 결핍의 상태에서 분출되는 의지이다.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거나 자신의 재능이 부족함을 받아들이는 의식에서 희망은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절망적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자발적 의지가 부족한 상태에서 기적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이 말한 기적은 ‘살아있음’ 그 자체에 대한 감사와 경외심敬畏心을 갖는 것을 뜻한다고 할 때,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지금, 이 순간에 살아있음에 대해서 우리는 마땅히 그러한 것이라고 오해(?)를 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 살아있음에 대해 잠재된 공포에서 비롯된 불안과 권태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평온한 삶을 간구 하면서도 그 평온한 삶이 주는 권태와 죽음에 대해 짐짓 유보留保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생멸生滅은 자연계의 불문율이다. 안락한 삶을 추구하면서도 그러한 삶에서 파생하는 권태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우리는 서둘러 종교에 귀의하거나 아니면 유한한 삶을 복기復棋하는 예술의 영역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이효 시인의 첫 시집 『당신의 숨 한 번』은 “나는 말이 없고 뼈만 남은 채 /...(중략)... 바람 속에 척추 하나 세우고 있다”(「가시나무」)는 자신의 존재를 고독의 뼈를 세우고 있는 가시나무로 규정하고 정답이 없는 인생 자신만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의지를 가득 담고 있다.

 

그가 운명적으로 마주했던 혈족들과 자신 앞에 무수히 펼쳐지고 사라지는 사물들, 아무런 인연도 닿지 않았으나 비극적 국면으로 떨어져 생을 마감한 사람들로부터 부조리한 이 세상의 기적이,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경외심을 갖는 것으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인지 묻고 또 묻는 것이다. 시인에게 기적은 살아있었던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시詩가 곁에 있다는 것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덮인 산길

홀로 오르며

첫 발자국 찍는다

산길을 따라서

찍어놓은 헐렁한 발자국에

마음을 들여놓는다

하늘과 땅과 산이 알몸으로 만나고

부끄러움이 고요해지는 순간

 

 

-「詩」전문

 

시의 정의는 무수히 많다. 이 말은 시인이라 스스로 일컫는 사람마다 나름의 시에 대한 정의가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효 시인에게 있어서 기적은 그저 아무렇지 않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나쳐 왔던 시간 속에 명멸했던 사람들과, 사물과 사건들이 발효되면서 그가 만들어낸 시, 그 자체이다. 눈 덮인 산길에 첫 발자국을 찍는 높은 곳- 신神이거나 세상의 아름다움이거나-을 향하는 경건함, 이 세상의 풍진風塵을 벗어던지는 알몸과 부끄러움이 고요해지는 세속의 가치를 잊어버리는 행위를 시라고 명명할 때, 그를 둘러싸고 있는 희로애락의 풍경들은 시간 속에 아로새겨진 문신文身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이 이효 시인의『당신의 숨 한 번』은 고독한 존재인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생멸의 고리를 아프게 성찰하면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시편들을 보여주고 있다. 시집의 1부에 집중되어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시편들은 단순히 그들에 대한 애모愛慕의 감정을 표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자신의 삶의 종말을 예견하고 그 종말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탐색을 궁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보다 앞선 세대는 전통적 농경사회의 규범과 풍요롭지 못한 빈궁을 건너왔으며- (「사발 밥」참조 )- 전쟁의 참화를 몸으로 겪은 세대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노동은 앞서 이야기한 안락한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투쟁에 가까웠을 것이다. 시집『당신의 숨 한 번』의 1부는 부모의 내리사랑을 회고하면서 그 누구도 예견할 수 없었던 그들의 노후老後를 어찌할 수 없는 짐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농경사회에서의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대가족 제도의 풍습은 소멸해가고 있으며, 예전의 노망老妄은 치매라는 병명을 달고 단지 수명을 연장하는 약에 의존하면서 자신이 살던 집에서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요양원과 요양병원으로 끌려가고(?) 있다. 예전의 효孝의 개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권장될 수도 없다. 그 누가 기억을 상실하고 가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존재가 되리라고 생각했겠는가! 이렇게 혈연과의 단절을 시인은 ‘어쩔 수 없는’ 당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아버지 기억은 끊어진 거미줄

혼자 대문을 열고 나간다

남자는 그를 절벽 끝에서 부른다

혓바닥은 해진 발바닥이 되어간다

 

산에서 길을 잃게 하면 어때?

아내의 입에서 검은건반 같은

말들이 꿈틀거린다

시퍼런 이끼는 부부 사이를 덮는다

 

요양원에 아버지를 부치고 돌아가는 길

깨진 전조등이 된 남자가

의자 끝에서 울먹인다

돌 안에 갇힌 그

 

손잡이 없는 하루가 참 멀다

 

- 암막 커튼」전문

제어할 수 없는 기이한 돌출 행동으로 가정의 평화가 깨지고 “산에서 길을 잃게 하면 어때?”와 같은 나쁜 생각과 결국은 “요양원에 아버지를 부치고 돌아가”야 하는 현실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기껏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막연한 슬픔이 막연한 불길함으로 자신의 불초不肖가 자식 대에까지 이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 아니겠는가!

 

 

산소 양지쪽 질긴 잡초들

날개 달겠다고 올라오고

여자는 모질게 슬픔 뽑는다

등 뒤에 햇살은

산소 위 서리를 녹여주는데

오랜만에 찾아온 못난 자식

고마운 햇살에게 몸을 숙인다

 

아버지를 매일 찾아와

따뜻한 이불을 덮어주는 너

나보다 낫구나

 

눈에 햇살이 번지니 산짐승이 운다

 

 

- 「 나보다 낫구나 」전문

 

이와 같이 시인은 마땅히 모든 생명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 惻隱之心)과 잘못된 일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수오지심 羞惡之心)의 회생 回生을 간구하면서도 변화하는 생활환경에 재빨리 적응해가는 인간의 영특함의 아픔을 예리하게 파헤치는 냉정함을 놓치지 않는다. 같은 을乙이면서도 그 아래 을乙인 경비원을 착취하는 아파트 관리소장의 행태(경비원 K」참조), 무책임하게 임신한 여자를 버리고 떠난 남자(달팽이관 속의 두 번째 입맞춤」참조) 또한 같은 층위의 인간관계를 빗댄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더 많이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착함’과 ‘아름다움’은 ‘나’와 ‘너’, ‘나와 이웃’의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지 결코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시인은 인간을 떠나 자연에 눈을 돌리게 된다. 자연은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까닭에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은 인간 사회의 야비함과는 그 결이 다르다.

 

 

 

이른 아침

숲에 든다

테크론보다 질긴

생명력을 지닌 칡넝쿨

 

오르고 또 올라서

넝쿨 아래 나무들

한 조각의 빛 눅눅해진다

푸른 투망에 갇힌 나무들

 

힘 있는 자여

절망의 잎 덮지 말아라

햇살은 누군가에게

지푸라기 같은 양식이다

 

숲에서 나오는 길

내 신발 밑에도 칡꽃이

가득 묻었다

 

숲은 내게 살아있는 경전이다

 

- 「숲에 서다」전문

 

 

이효 시인에게 있어서 자연은 인간과 대비되는 상징이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자연의 메커니즘을 자꾸 훼손하고 있다. 삶에 필요한 유용성과 편리성의 잣대로 약탈에 가까운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은 그들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많은 자원을 다른 것으로부터 빼앗지 않는다.

 

「숲에 서다」는 시집『당신의 숨 한 번』의 척추에 해당하는 시로서 간결하면서도많은 의미를 함축하는 시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칡은 덩굴식물의 특성으로 나무들을 휘감아 고사시키는 고약한 나무이다. 그런데 갈근葛根, 즉 칡뿌리는 약재로서 사용되며 귀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어쨌든 칡의 끈질긴 생명력은 우리 삶의 불화를 일컫는 갈등葛藤으로 요약되기도 한다. 칡과 등나무가 서로 엉키게 되면 그 둘은 치열한 자리다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거의 드물다. 칡과 등나무는 한자리에 함께 자라면서 그 넝쿨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등나무가 시계방향으로 뻗어나가면 칡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숲은 각자의 방식에 따라 살아가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맑은 바람과 물 그리고 햇빛뿐이다. 꽃은 인간을 위해 피는 것도 아니고 완상의 기쁨을 주기 위해서 형형색색의 자태를 뽐내는 것이 아니다. “숲은 내게 살아있는 경전” 이 되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보이지 않는 생멸의 아픔이 그들의 말 없음에 깃들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잣대가 쓸모가 없는 자연은 단지 가식이 없고 장식이 없는 알몸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추함을 일깨워준다. 가공되지 않고 일체의 판단을 용납하지 않는 진면목을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산이 호수를 안고 있다

 

물고기들이 끌고 가는

 

붉은 나뭇잎들

 

호수를 살짝 들췄더니

 

가을이 너무 깊다

 

- 「살짝 들췄더니」전문

 

 

시 「숲에 서다」에서 시인이 ‘숲이 살아있는 경전’이라고 한 뜻은 경전 經典이 지난한 공부를 위한 교재라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삶의 여러 척도를 벗어던지면 – 온갖 가치가 사라진- “뜨거운 여름, 섬 하나 / 두 다리를 오므리고 누운 모습 / 생명을 품은 여인의 몸”(신지도」1연) 생명, 그 자체의 에너지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를 직각적으로 받아들일 때 나타나는 경이驚異에 다름 아니다.

 

5행 또는 5연으로 해석해도 무방한 시「살짝 들췄더니」는 위에서 말한 겉의 현상이 아니라 내면의 의미를 추출하는 묘미를 보여주는 시이다. ‘살짝’이라는 단어가 주는 가벼움과 우연성이, 깊은 사유를 통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삶의 비의를 목도할 수 있다는 일상의 즐거움과 맥락이 닿아 있는 것이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가을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찬 서리가 내리고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은 물들고 이윽고 떨어진다. 시인은 호수에 내려앉은 산을 통해서 단풍잎들을 본다. 그 붉은 잎들은 호수에 투영된 그림자이다. 그래서 물고기들이 끌고 가는 것은 실제의 나뭇잎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가을을 인생의 후반기를 빗대어 이야기하곤 한다. 산이나 붉은 나뭇잎이 실제로 호수에 내려앉은 것이 아니듯이, 물고기가 끌고 가는 것이 그림자일 뿐이듯이, 삶은 몽환夢幻 그 자체일 뿐이라는 한탄과 슬픔을 제거한 채로 여백으로 제시될 때 시의 애매성은 한층 그 값을 더하는 것이다.

 

 

이효 시인의 미덕은 그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나 소재에 감상 感傷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거리를 유지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혈족 – 부모, 할머니와 같은-의 쇠락해가는 모습을 이야기하면서도 과장된 효심을 드러내기보다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을 표명하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거나 전통 서정시의 본령인 대상과 시적 자아를 일치시키는 것을 자제하면서 그 대상의 본질에 초점을 맞추는 시법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한 기미가 그러한 방증이 될 수 있겠다. “술 사발 엎는 할아비처럼/ 산수유꽃 쏟아진다”(「산수유」), “목련은 나뭇가지에 목을 건다”(봄날은 간다」).

 

 

그럼에도 시집『당신의 숨 한 번』은 냉소가 아닌 서정抒情 - 측은지심-을 바탕으로 하는 일관성이 돋보인다. 비유의 적절성에 있어서 다소 건조한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 점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큰 힘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존재의 소멸이라는 큰 주제를 다룸에 있어 시의 방향성은 관조觀照 - 달관 – 를 향해가거나 비탄으로 함몰되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비탄의 어조를 따라가게 될 때 만나게 되는 허무는 예술이 지향하는 영원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하기에 많은 시인들은 관조를 터득하기 위한 노력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노력과 희망이 거짓된 문장으로 희화화 戲畫化 되는 경우에는 아무런 의미도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 시집『당신의 숨 한 번』은 회사후소 繪事後素가 뜻하는 바 시인 자신의 마음을 평정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한다.

 

젊음은 늙어봐야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효 시인이 되짚어보는 젊음은 농경의 공동체 의식과 가난하지만 각별한 사랑을 가르쳐준 선대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유일한 재산인 소가 뛰쳐나갈 때 고삐를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아이를 향해 “얘야, 고삐를 놓아라 / 그래야 산다”(「얘야, 고삐를 놓아라」)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삭막해지는 세상살이 속에서도, 생로병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운명이라고 해도 이 지상에 남는 것은 사랑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떠나간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

 

- 「꽃잎 저리도 붉은가요」 마지막 연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

부엌에 온기를 넣는 것

 

- 「숟가락을 놓다」마지막 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죽음의

문턱까지 가본 적 있는가

사랑이 가장 낮은 음에 이르면

비로소 마음속 깊은 울음 벗는다

 

- 「마른 꽃을 사랑하는 사람」1연

 

 

몇 편의 시에서 뽑은 ‘사랑’에 대한 시인의 범주는 ‘떠나간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으로서 물질(몸)은 소멸해도 정신은 영원함을 믿는 것이며, 타인에게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행위이며, 낮게 낮게 가라앉은 자세로 마음속 깊은 울음 – 소멸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해소시켜준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을 선천적으로 구유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효 시인 또한 이미 그런 사랑을 체득하고 생활화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시인은 그런 목표를 향해, 그런 사랑의 완성을 위해 오체투지五體投地하는 존재임을 천명하는 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을까? 시인은 그리하여 스스로 자문하고 반성한다.

 

미소가 사라진 세상에 꽃을 내거는 일은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세상 벽 속에 갇혀 헤엄치느라 변변한 꽃 한 송이 문 앞에 내어놓지 못했네

창문 앞에 꽃을 거는 일은 숨 막히는 시간들, 선물 상자 푸는 일

 

 

- 「질문과 대답 사이로」전문

 

숨이 막히면 숨을 쉬어야 한다. 사랑이라는 들숨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은 쉼의 아늑한 경지로 다가서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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