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당신의 당신 / 문 혜 연 (2019,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푸른 언덕 2021. 11. 26. 17:23

그림 / 김 현 경

 

 

당신의 당신 / 문 혜 연

(2019,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새들의 울음은 그들의 이름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갖게 될까요

원래 인간은 제 이름보다 남의 이름을

더 많이 부르는 종이잖아요

나는 당신의, 당신은 나의 이름을

새들에게 우리는 우리일까요

 

우리를 대신할 말을 찾아요

수많은 단어들이 사라져요

뻐끔거리던 입술들이 짝을 짓습니다

입술을 부딪치며, 서로에게 옮아가는 인간들

새들은 인간과 상관없이 날아다닙니다

새들은 새들이고, 우리는 우리입니다

부리를 부딪치는 새들은

정다운 만큼 가벼운가 봐요

 

자신을 닮은 사람을 세 번 만나면 죽는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요

지렁이와, 지렁이 모양 젤리

그걸 공포라 할 수 있나요

머리와 꼬리를 알 수 없는 젤리는

달콤하고 모호한, 주인 모를 관계들

우리는 점점 닮아 가는데

누가 누굴 닮은 건지 모를 때는

어떻게 할까요, 당신은 지금

2%의 당신 자신과, 98%의 당신의 당신

순도 높지 않은 당신, 그리고 나

끝 모를 바닥으로 가라앉아요

 

새들은 언제나 아득한 높이에서 웁니다

그림자도 생기지 않을 물에는

새의 밑면만 지나갑니다

깊이 가라앉은 바닥, 그곳에서 우리는

떠오를 수 없는 낮은 음, 낮은 울음

 

새들의 이름은 그들의 인사가 됩니다

우리의 울음도 우리의 내일이 될까요

안녕, 당신, 안녕

유언 같은 안부를 주고받아요

우리는 새들의 세계에서도, 서로의 이름만 부르고

인간은 역시, 새들에게는 이해받을 수 없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