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님이 오시는 날 / 이 효 그림 / 신 종식 눈님이 오시는 날 / 이 효 불온한 세상 곱게도 오시네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인간은 사랑인 줄 모르고 밟고 가네 하얀 발자국 위에 너와 내가 서로 엉켜 용서를 배운다 일기장이 하얗다 12월의 마지막 눈이 술에서 깬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문학이야기/자작시 2022.12.15
시월을 추억함 / 나호열 그림 / 구 경 순 시월을 추억함 / 나호열 서러운 나이 그 숨찬 마루턱에서 서서 입적(入寂)한 소나무를 바라본다 길 밖에 길이 있어 산비탈을 구르는 노을은 여기저기 몸을 남긴다 생(生)이란 그저 신(神)이 버린 낙서처럼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풀꽃이었을까 하염없이 고개를 꺾는 죄스런 모습 아니야 아니야 머리 흔들 때마다 우루루 쏟아져 나오는 검은 씨앗들 타버린 눈물로 땅 위에 내려앉을 때 가야할 집 막막하구나 그렇다 그대 앞에 설 때 말하지 못하고 몸 뒤채며 서성이는 것 몇 백 년 울리는 것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 나이었던가 향기(香氣)를 버리고 빛깔을 버리고 잎을 버리는 나이 텅 빈 기억 속으로 혼자 가는 발자국 소리 가득하구나 문학이야기/명시 2021.10.02
잊어버립시다 / 세라 티즈데일 그림 / BEA MEA SOON 잊어버립시다 / 세라 티즈데일 잊어버리세요. 꽃을 잊듯이, 한때 금빛으로 타오르던 불을 잊듯이, 영원히 아주 영원히 잊어버리세요, 시간은 친절한 벗, 우리를 늙게 하지요. 누군가 물으면, 이렇게 말하세요. 오래 오래전에 잊었노라고, 꽃처럼, 불처럼, 오래전에 잊혀진 눈 위에 뭉개진 발자국처럼 잊었노라고. 시집 / 시를 읽는 오후 문학이야기/명시 2021.07.09
놀란 강 / 공 광 규 그림 / 정 경 희 놀란 강 / 공 광 규 강물은 몸에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했는데 모래밭은 몸을 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 새들은 지문 위에 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 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 꾹꾹 찍고 돌아오는데 그래도 강은 수천 리 화선지인데 수만 리 비단인데 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 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 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 수십억 장 원고지인데 그걸 어쩌겠다고? 쇠붙이와 기계 소리에 놀라서 파랗게 지린 강 문학이야기/명시 2021.06.21
새 / 나 호 열 그림 / 조 수 정 새 / 나 호 열 잡으면 매운 연기로 사라져 버릴 듯 손 내밀 수 없는 사랑이여 한낮을 내내 허공 그대의 발자국을 좇아도 미리내 너머 눈물 쏟아내는 별빛이더니 무엇을 닦아내려는지 하얀 손 흔들리듯 그대 떠나고 난 후 돌아볼 수 없는 등짐이 한층 무거워졌네 그림 / 조 수 정 문학이야기/명시 2021.05.21
놀란 강 / 공 광 규 그림 : 김 경 희 놀란 강 / 공 광 규 강물은 몸에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하는데 모래밭은 몸에 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 새들은 지문 위에 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 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 꾹꾹 찍고 돌아오는데 그래서 강은 수천 리 화선지인데 수만 리 비단인데 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 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 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 수십억 장 원고지인데 그걸 어쩌겠다고? 쇠붙이와 기계 소리에 놀라서 파랗게 질린 강 문학이야기/명시 2021.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