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눈보라 / 황 지 우

푸른 언덕 2020. 12. 28. 16:15

장 용 길 <작 품>

눈보라 / 황 지 우

원효사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버린다.

눈보라여, 오류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 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 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데, 아주아주 추운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장 용 길 <작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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