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바람의 집(겨울 판화 1) / 기형도

푸른 언덕 2020. 11. 6. 15:44

바람의 집(겨울 판화 1) / 기형도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
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 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 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
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날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기형도
시집 문학과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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