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날개 6

그, 날 / 이 효

그림 / 김 연경 그, 날 / 이 효 ​ 흰 눈이 쌓인 산골짝 한 사내의 울음소리가 계곡을 떠나 먼바다로 가는 물소리 같다 ​하늘 향해 날개를 폈던 푸른 나뭇잎들 떨어지는 것도 한순간 이유도 모른 채 목이 잘린 직장 ​어린 자식들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어 하얀 눈발에 내려갈 길이 까마득하다 ​ 어머니 같은 계곡물이 어여 내려가거라 하얀 눈 위에 길을 내어주신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진화론을 읽는 밤 / 나호열

이재호 갤러리 ​ ​ ​ 진화론을 읽는 밤 / 나호열 ​ ​ 냉장고에서 꺼낸 달걀은 진화론의 지루한 서문이다 무정란의 하루가 거듭될수록 저 커다란 눈물 한 덩이의 기나긴 내력을 통째로 삶거나 짓이기고 싶은 약탈의 가여움을 용서하고 싶지 않다 비상을 포기한 삶은 안락을 열망한 실수 사막으로 쫓겨 온 낙타 아버지와 초원을 무작정 달리는 어머니의 말 그렇게 믿었던 맹목의 날들이 닭대가리 조롱으로 메아리친다 다시 나를 저 야생의 숲으로 보내다오 삶에서 쫓기며 도망치다 보면 날개에 힘이 붙고 휘리릭 창공을 박차 올라 매의 발톱에 잡히지 않으려는 수만 년이 지나면 쓸데없는 군살과 벼슬을 버린 진화론의 서문이 너무 길어 달걀을 깨버리는 이 무심한 밤 ​ ​ 2022년, 스토리 문학 108호 ​ ​ 이재호 갤러리

기쁨 Die Freuden / 괴테

그림 / 강민혜 ​ ​ ​ ​​ 기쁨 Die Freuden / 괴테 ​ ​ 우물가에서 잠자리 한 마리 명주 천 같은 고운 날개를 팔랑거리고 있다. 진하게 보이다가 연하게도 보인다. 카멜레온같이 때로는 빨갛고 파랗게, 때로는 파랗고, 초록으로, 아, 가까이 다가가서 그 빛깔을 바로 볼 수 있다면, ​ 그것이 내 곁을 슬쩍 지나가서 잔잔한 버들가지에 앉는다. 아, 잡았다! 찬찬히 살펴보니 음울한 짙은 푸른빛. ​ 온갖 기쁨을 분석하는 그대도 같은 경우를 맞게 되리라. ​ ​ ​ ​ 시집 / Johann Wolfgang von Goethe 괴테 시집 ​ ​ ​ ​ ​

부리와 뿌리 / 김 명 철

그림 / 서 순 태 ​ ​ ​ ​ ​ ​ 부리와 뿌리 / 김 명 철 ​ ​ ​ 바람이 가을을 끌고와 새가 날면 안으로 울리던 나무의 소리는 밖을 향한다 나무의 날개가 돋아날 자리에 푸른 밤이 온다 ​ ​ 새의 입김과 나무의 입김이 서로 섞일 때 무거운 구름이 비를 뿌리고 푸른 밤의 눈빛으로 나무는 날개를 단다 ​ ​ 새가 나무의 날개를 스칠 때 새의 뿌리가 내릴 자리에서 휘바람 소리가 난다 나무가 바람을 타고 싶듯이 새는 뿌리를 타고 싶다 ​ ​ 밤을 새워 새는 나무의 날개에 뿌리를 내리며 하늘로 깊이 떨어진다 ​ ​ ​ ​ 김명철 시집 / 짧게, 카운터펀치 ​ ​ ​ ​

귀와 뿔 / 정 현 우

그림 / 정 현 순 ​ ​ ​ ​ ​ 귀와 뿔 / 정 현 우 ​ ​ 눈 내린 숲을 걸었다. 쓰러진 천사 위로 새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천사를 등에 업고 집으로 데려와 천사를 씻겼다. 날개에는 작은 귀가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귀를 훔쳤다. 귀를 달빛에 비췄고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다. 두 귀. 두 개의 깃. 인간의 귀는 언제부터 천사의 말을 잊었을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순간과 타들어가는 귀는 깃을 달아주러 오는 밤의 배려. 인간의 안으로만 자라는 귀는 끝이 둥근 칼날. 되돌려주지 않는 신의 목소리. 불로 맺혔다가 어둠으로 눈을 뜨는 안. 인간에게만 닫혀 있고 새와 구름에게 열려 있다. 목소리를 들으려 할 때 귓바퀴를 맴도는 날갯짓은 인간과 천사의 사이 끼어드는 빛의 귀. 불이 매달려 있다고 말하면 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