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이효시집당신의숨한번 4

소리를 꿰매는 법 / 이 효

그 림 / 송인관 ​ ​ ​ 소리를 꿰매는 법 / 이 효 ​ ​ 겨울바람이 쿨럭이면 트고 갈라진 입술을 비좁은 창문 틈에 대고서 달동네는 밤새 휘파람을 불었다 손수레에 쪽방을 끌고 가는 노파 고물상으로 가는 길, 바퀴 터지는 소리 사이로 지난겨울 맹장 터진 어린 손주의 비명이 걸어 나온다 어미는 어디로 갔는지 성냥갑 닮은 쪽방에 아이 하나 촛농처럼 식어간다 자원봉사자들 연탄 나르던 비탈진 골목길 재개발 소식에 이웃들 불꽃 꺼지듯 사라지고 반쯤 열린 대문 앞 빨간 고무대야 속에는 지난여름을 박제시킨 꽃들이 떠난 이웃의 말라버린 이름을 솎아낸다 이른 새벽에 파지 줍는 세월은 바늘귀에 침묵을 꿰어 기울어가는 생을 덧대는 일이다 조각보처럼 이어온 날짜들이 노파의 입가에 주름처럼 세 들어 산다 당고개역 잡화가게 ..

달팽이관 속의 두 번째 입맞춤

그림 / 박명애 달팽이관 속의 두 번째 입맞춤 입맞춤을 연습해 본 적이 없어 광신도가 춤을 추던 그날 밤 생명이 자궁에 바늘처럼 꽂혔지 아빠라는 단어를 사막에 버린 남자 무표정한 가을이 오고, 혈액형을 쪼아대는 새들 끊어진 전선으로 반복된 하루 딱 한 번의 입맞춤 눈빛이 큰 불을 지핀 거야 모든 삶의 경계를 허물고 싶어 매일 밤, 암막 커튼을 치고 바다로 가는 꿈을 꿔 나쁜 생각들이 골수를 빼먹어 아비도 없는 애를 왜 낳으려고 하니? 이름도 모르는 신에게 아가 울음을 택배로 보낼 수 없잖아 나는 썩지 않는 그림자니까 어느 날, 종소리가 달팽이관을 뚫고 아기 숨소리 깃털이 된다 생명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거래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세상에 두 번째 입맞춤을 알릴 거야 그건 슬픔이 아닌, 정오의 입맞춤 이효 ..

꿈의 방정식 / 이 효

그림 / 성기혁 꿈의 방정식 / 이 효 지게 위 비단 날개 살포시 올라간다 하늘을 날겠다는 소녀는 백 년 전에 하늘길을 묻는다 작대기 끝처럼 불안한 나라 책보따리 가슴에 둘러매고 동해를 건너 낯선 땅에 선다 조국을 잃은 분노의 질주일까 운명처럼 남자를 품은 죄일까 뒷바퀴가 빠져버린 여자 조국으로 돌아오는 길 천둥 번개 하늘이 말리더니 서른세 살, 푸른 날개 현해탄에서 물거품이 된다 날아야지, 날아야지, 여류 비행사의 부서진 꿈 그녀의 절규는 수직으로 다시 오른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숟가락을 놓다 / 이 효

그림 / 후후 숟가락을 놓다 / 이 효 ​낡은 부엌문 바람이 두들기는데 빈 그릇에 바람 소리 말을 더듬고 장작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둥근 밥상에 수저 두 개 올려놓고 비린내 나는 생선을 굽는다 할머니 나물 팔던 손으로 부엌문 활짝 열어 놓았다 ​ 바람은 잠시 단추를 채우고 나간다 그림자 된 춥고 외로운 사람들 쓰러진 술병처럼 몸이 얼었다 녹는다 산산이 발려진 생선 가시의 잔해들 ​무표정한 가시를 모아 땅에 묻는다 상처 난 것들 위로 첫눈이 내린다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 부엌에 온기를 넣는 것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