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담벼락 3

​연둣빛까지는 얼마나 먼가 / 조인성

그림 / 최 현 정 ​ ​ ​ ​ 연둣빛까지는 얼마나 먼가 / 조인성 ​ ​ ​ ​ 오후 4시 역광을 받고 담벼락에 휘는 그림자는 목이 가늘고 어깨가 좁다 고아처럼 울먹이는 마음을 데리고 타박타박 들어서는 골목길 ​ ​ 담장 너머엔 온몸에 눈물을 매단 듯, 반짝이는 대추나무 새잎 ​ ​ 저에게 들이친 폭설을 다 건너서야 가까스로 다다랐을 새 빛 대추나무 앙상한 외곽에서 저 연둣빛까지는 얼마나 멀까 ​ 잎새 한잎, 침묵의 지문 맨 안쪽 돌기까지는 얼마나 아득한 깊이일까 글썽이는 수액이 피워올린 그해 첫 연둣빛 불꽃까지는 ​ ​ ​ ​ 조인성 시집 / 장미의 내용 ​ ​ ​ ​ ​ ​ ​

날품 / 김 명 희

그림 / 정 은 하 ​ ​ 날품 / 김 명 희 ​ 이른 새벽 한 무리의 인부들이 봉고차에 실린다 이내 어느 현장으로 옮겨진 그들 어둠을 깨고 부수고 그 위에 아침을 쌓는다 건물이 한 뼘씩 오를 때마다 그들의 몸은 개미들처럼 작아진다 안전화는 전혀 안전하지 못한 공중만 떠들고 가벼운 지폐 몇 장 삼겹살과 소주로 선술집 상을 채우는 고마운 저녁 밤이 이슥해지자 한둘만 남기고 봉고차는 어둠저쪽 어디론가 사라지고 무심히 흘려 넣은 거나한 꿈들은 졸음 한켠 후미진 담벼락에서 음습한 절망으로 젖어간다 희망의 괘도를 벗어난 안전화만이 누군가의 넋두리를 따라서 귀가하는 밤 이젠, 욱신거리는 잠의 날품을 팔아야 할 시간이다 ​ ​ ​ ​ 김명희 시집 / 화석이 된 날들 ​ ​ ​ ​

접시꽃 당신 / 도 종 환

그림 / 강 계 진 ​ ​ 접시꽃 당신 / 도 종 환 ​ ​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 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짖지 않으며 살려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어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