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끝과시작 3

방랑의 엘레지 / 쉼보르스카

그림 / 이은실 방랑의 엘레지 / 쉼보르스카 모든 것이 내 것이지만, 내 소유는 아니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내 것이지만, 기억으로 소유할 순 없다. 가까스로 기억을 떠올린들 불확실할 뿐. 머리를 잘못 맞춘 여신의 조각상처럼. 사모코프에 내리는 비는 멈출 줄 모른다. 파리의 정경은 루브르에서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점까지 가물가물 희미하게 사라져간다. 생마르탱의 가로수 길, 그곳의 계단은 갈수록 페이드아웃. 내 기억 속에서 '다리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고작 다리 한 개와 반쯤 남은 또 다른 다리의 영상. 가여운 웁살라에는 무너진 대성당의 잔해. 소피아에는 얼굴없이 몸통만 남은 가여운 무희가 있다 눈동자 없는 그의 얼굴 따로, 동공 없는 그의 눈동자 따로, 고양이의 동공도 따로. 새롭게 재건된 협곡..

끝과 시작 / 쉼보르스카스

그림/ 서길순 끝과 시작 / 쉼보르스카스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 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 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 시체로 가득 찬 수레가 지나갈 수 있도록 누군가는 길가의 잔해들을 한옆으로 밀어내야 하리. 누군가는 허우적대며 걸어가야 하리. 소파의 스프링과 깨진 유리 조각, 피 묻은 넝마 조각이 가득한 진흙과 잿더미를 헤치고. 누군가는 벽을 지탱할 대들보를 운반하고, 창에 유리를 끼우고, 경첩에 문을 달아야 하리. 사진에 근사하게 나오려면 많은 세월이 요구되는 법. 모든 카메라는 이미 또 다른 전쟁터로 떠나버렸건만. 다리도 다시 놓고, 역도 새로 지어야 하리. 비록 닳아서 누더기가 될지언정 소매를 걷어붙이고. 빗자루를 손에 든 누군가가 과거를 회상하면, 가만히..

카테고리 없음 2023.04.01

뜻밖의 만남 / 쉼보르스카

그림 / 박대현 ​ ​ ​ 뜻밖의 만남 / 쉼보르스카​ ​ ​ 우리는 서로에게 아주 공손하게 대하며, 오랜만에 만나서 매우 기쁘다고 말한다. ​ 우리의 호랑이들은 우유를 마신다. 우리의 매들은 걸어 다닌다. 우리의 상어들은 물에 빠져 허우적댄다. 우리의 늑대들은 훤히 열린 철책 앞에서 하품을 한다. ​ 우리의 독뱀은 번개를 맞아 전율하고, 원숭이는 영감 때문에, 공작새는 깃털로 인해 몸을 부르르 떤다. 박쥐들이 우리의 머리 위로 멀리 날아가버린 건 또 얼마나 오래전의 일이던가. ​ 문장을 잇다 말고 우리는 자꾸만 침묵에 빠진다. 무력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 인간들은 대화하는 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 ​ ​ 쉼보르스카 시선집 / 끝과 시작 ​ ​ ​​ ​ 그림 / 김정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