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언니 3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 이규리

그림 / 서 순 태 ​ ​ ​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 이규리 ​ 공원 안에 있는 살구나무는 밤마다 흠씬 두들겨맞는다 이튿날 가보면 어린 가지들이 이리저리 부러져 있고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가 깨진 채 떨어져 있다 새파란 살구는 매실과 매우 흡사해 으슥한 밤에 나무를 때리는 사람이 많다 ​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것이다 키 큰 내가 붙어 다닐 때 죽자고 싫다던 언니는 그때 이미 두들겨맞은 게 아닐까 키가 그를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평생 언니를 때린 건 아닐까 ​ 살구나무가 언니처럼 무슨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매실나무도 제 딴에 이유를 따로 남기지 않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도 서로 아프고 서로 미안해서, 가까운 것들을 나중에 어느 먼 곳에서 만나면 미운 정 고운 정,..

칼로 사과를 먹다 / 황 인 숙

그림 / 권 현 숙 ​ ​ 칼로 사과를 먹다 / 황 인 숙 ​ ​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무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 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 ​ 시집 / 어느 가슴엔들..

사라진 입들 / 이 영 옥

사라진 입들 / 이 영 옥 잠실 방문을 열면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어두컴컴한 방안을 마구 두드리던 비, 눈 뜨지 못한 애벌레들은 언니가 썰어주는 뽕잎을 타고 너울너울 잠들었다가 세찬 빗소리를 몰고 일어났다 내 마음은 누가 갉아먹었는지 바람이 숭숭 들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들이 통통하게 살아 오를 동안 언니는 생의 급물살을 타고 허우적거렸고 혼자 잠실방을 나오면 눈을 찌를 듯한 환한 세상이 캄캄하게 나를 막아섰다 저녁이면 하루살이들이 봉창 거미줄에 목을 매러 왔다 섶 위로 누에처럼 얕은 잠에 빠진 언니의 숨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명주실 같았다 허락된 잠을 모두 잔 늙은 누에들은 입에서 실을 뽑아 제가 누울 관을 짰지만 고치를 팔아 등록금으로 쓴 나는 눈부신 비단이 될 수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