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밥상 4

밥 먹는 법 / 정호승

그림 / 명은주 밥 먹는 법 / 정호승 밥상 앞에 무릎을 꿇지 말 것 눈물로 만든 밥보다 모래로 만든 밥을 먼저 먹을 것 무엇보다도 전시된 밥을 먹지 말 것 먹더라도 혼자 먹을 것 아니면 차라리 굶을 것 굶어서 가벼워질 것 때때로 바람부는 날이면 풀잎을 햇살에 비벼 먹을 것 그래도 배가 고프면 입을 없앨 것 정끝별 밥시 이야기 / 밥

소풍 / 나 희 덕

그림 / 김 한 솔 ​ ​ ​ ​ 소풍 / 나 희 덕 ​ 얘들아, 소풍 가자. 해지는 들판으로 나가 넓은 바위에 상을 차리자꾸나. 붉은 노을에 밥 말아먹고 빈 밥그릇 속에 별도 달도 놀러 오게 하자. 살면서 잊지 못할 몇 개의 밥상을 받았던 내가 이제는 그런 밥상을 너희에게 차려줄 때가 되었나 보다. 가자, 얘들아, 어서 저 들판으로 가자. 오갈 데 없이 서러운 마음은 정육점에 들러 고기 한 근을 사고 그걸 싸서 입에 넣어 줄 채소도 뜯어왔단다. 한 잎 한 잎 뜯을 때마다 비명처럼 흰 진액이 배어 나왔지. 그리고 이 포도주가 왜 이리 붉은지 아니? 그건 대지가 흘린 땀으로 바닷물이 짠 것처럼 엄마가 흘린 피를 한 방울씩 모은 거란다. 그러니 얘들아, 꼭꼭 씹어 삼켜라. 그게 엄마의 안창살이라는 걸 몰라도..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 송찬호​

그림 / 이고르 베르디쉐프 (러시아) ​ ​ ​ ​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 송찬호 ​ ​ 누가 저기다 밥을 쏟아 놓았을까 모락모락 밥 집 위로 뜨는 희망처럼 늦은 저녁 밥상에 한 그릇 달을 띄우고 둘러앉을 때 달을 깨뜨리고 달 속에서 떠오르는 노오란 달 ​ 달은 바라만 보아도 부풀어 오르는 추억의 반죽 덩어리 우리가 이 지상까지 흘러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빛을 잃을 것이냐 ​ 먹고 버린 달 껍질이 조각조각 모여 달의 원형으로 회복되기까지 어기여차, 밤을 굴려 가는 달비처럼 빛나는 단단한 근육 덩어리 달은 꽁꽁 뭉친 주먹밥이다. 밥집 위에 뜬 희망처럼, 꺼지지 않는 ​ ​ ​ 시집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 ​

9월도 저녁이면 / 강 연 호

그림 / 정 경 혜 ​ ​ ​ ​ 9월도 저녁이면 / 강 연 호 ​ ​ ​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 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 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치던 아이들 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 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 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 빈집의 돌담은 제풀에 귀가 빠지고 지난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 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 애매한 그리움이란 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 ​ ​ 시집 /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