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죽음 5

별들은 따뜻하다 / 정 호 승

그림 / 권신아 ​ ​ ​ 별들은 따뜻하다 / 정 호 승 ​ ​ ​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 ​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두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 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 ​ ​ ​ ​ ​ 시집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 ​ ​ ​

바구미를 죽이는 밤 / 문성해

그림 / 문 경 조 ​ ​ ​ ​ 바구미를 죽이는 밤 / 문성해 ​ ​ ​ 처음엔 작은 활자들이 기어 나오는 줄 알았다 신문지에 검은 쌀을 붓고 바구미를 눌러 죽이는 밤 턱이 갈라진 바구미들을 처음에는 서캐를 눌러 죽이듯 손톱으로 눌러 죽이다가 휴지로 감아 죽이다가 마침내 럭셔리하게 자루 달린 국자로 때려 죽인다 죽음의 방식을 바꾸자 기세 좋던 놈들이 주춤주춤, 죽은척 나자빠져 있다가 잽싸게 도망치는 놈도 있다 놈들에게도 뇌가 있다는 것이 도무지 우습다 ​ 혐오의 죄책감도 없이 눌러 죽이고 찍어 죽이고 비벼 죽이는 밤 그나저나 살해가 이리 지겨워도 되나 고만 죽이고 싶다 해도 기를 쓰고 나온다 이깟 것들이 먹으면 대체 얼마를 먹는다고 쌀 한 톨을 두고 대치하는 나의 전선이여 아침에는 학습지를 파는 전화와..

초원의 빛 / 윌리엄 워즈워스

그림 / 이 상 옥 ​ ​ ​ 초원의 빛 / 윌리엄 워즈워스 ​ ​ 한때 그토록 찬란했던 빛이건만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강한 힘으로 살아남으리 존재의 영원함을 티 없는 가슴으로 믿으리 삶의 고통을 사색으로 어루만지고 죽음마저 꿰뚫는 명철한 믿음이라는 세월의 선물로 ​ ​ ​ 시집 / 매일 시 한 잔 ​ ​ ​

혀 / 정 호 승

​ ​ 혀 / 정 호 승 ​ ​ 어미개가 갓난 새끼의 몸을 핥는다 앞발을 들어 마르지 않도록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온몸 구석구석 혀로 핥는다 병약하게 태어나 젖도 먹지 못하고 태어난 지 이틀만에 죽은 줄을 모르고 잠도 자지 않고 핥고 또 핥는다 나는 아이들과 죽은 새끼를 손수건에 고이 싸서 손바닥만한 언 땅에 묻어주었으나 어미개는 길게 뽑은 혀를 거두지 않고 밤새도록 허공을 핥고 또 핥더니 이튿날 아침 혀가 다 닳아 보이지 않았다 ​ ​ ​ 시집 : 내가 사랑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