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이재호갤러리 4

찬밥 / 문정희

그림 / 박연숙 찬밥 / 문정희 아픈 몸을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제품이 있어 일 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는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 훑어 누가 남긴 무 조각에 생선 가시를 핥고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닥거리던 그 손이 그리워 나 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를 만났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 문정희 시집 / 내 안에 새를 꺼내주세요 이재호 갤러리

진화론을 읽는 밤 / 나호열

이재호 갤러리 ​ ​ ​ 진화론을 읽는 밤 / 나호열 ​ ​ 냉장고에서 꺼낸 달걀은 진화론의 지루한 서문이다 무정란의 하루가 거듭될수록 저 커다란 눈물 한 덩이의 기나긴 내력을 통째로 삶거나 짓이기고 싶은 약탈의 가여움을 용서하고 싶지 않다 비상을 포기한 삶은 안락을 열망한 실수 사막으로 쫓겨 온 낙타 아버지와 초원을 무작정 달리는 어머니의 말 그렇게 믿었던 맹목의 날들이 닭대가리 조롱으로 메아리친다 다시 나를 저 야생의 숲으로 보내다오 삶에서 쫓기며 도망치다 보면 날개에 힘이 붙고 휘리릭 창공을 박차 올라 매의 발톱에 잡히지 않으려는 수만 년이 지나면 쓸데없는 군살과 벼슬을 버린 진화론의 서문이 너무 길어 달걀을 깨버리는 이 무심한 밤 ​ ​ 2022년, 스토리 문학 108호 ​ ​ 이재호 갤러리

도마의 구성 / 마경덕

그림 / 이철규 ​ ​ ​ 도마의 구성 / 마경덕 ​ ​ 나무도마에게 딸린 식구는 혼자 사는 여자와 칼 하나 닭집 여자는 칼에게 공손하고 칼은 도마를 얕본다 서열은 칼, 여자, 도마 도마는 늙었고 칼은 한참 어리다 칼받이 노릇에 잔뼈가 물러버린 도마는 칼 하나와 애면글면 둘 사이에 죽은 닭이 끼어들면 한바탕 치고 받는다 내리치는 서슬에 나이테가 끊어지고 이어 찬물 한 바가지 쏟아진다 닭이 사라져도 도마를 물고 있는 칼 칼은 언제나 도마 위에서 놀고 도마는 칼집투성이다 이 조합은 맞지 않아요 도마가 애원해도 여자는 늘 도마를 무시하고 칼은 여전히 버릇이 없다 어디서 굴러온 막돼먹은 칼을 여자는 애지중지 받는다 ​ ​ ​ 마경덕 시집 / 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밤 ​ ​ 이재호 갤러리

실패의 힘 / 천양희

그림 / 박혜숙 ​ ​ ​ ​ 실패의 힘 / 천양희 ​ ​ ​ 내가 살아질 때까지 아니다 내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애매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 비가 그칠 때까지 철저히 혼자였으므로 나는 홀로 우월했으면 좋겠다 ​ 지상에는 나라는 아픈 신발이 아직도 걸어가고 있으면 좋겠다 오래된 실패의 힘으로 그 힘으로 ​ ​ ​ ​ 천양희 시집 / 새벽에 생각하다 ​ ​ ​ ​ ​ 이재호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