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열매 3

그만 내려놓으시오 / 공광규

그림 / 이율 그만 내려놓으시오 / 공광규 인생 상담을 하느라 스님과 마주 앉았는데 보이차를 따라놓고는 잔을 들고 있어 보라고 한다 작은 찻잔도 오래 들고 있으니 무겁다 그만 내려놓으시오 찻잔을 내려놓자 금세 팔이 시원해졌다 절간을 나와 화분에 담겨 시든 꽃을 매달고 있는 화초와 하수가 고여 썩은 개천을 지나오는데 꽃은 화려함을 땅에 내려놔야 열매를 얻고 물은 도랑을 버려야 강과 바다에 이른다는 말씀이 내 뒤를 따라온다 *공광규 시집 / 파주에게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 이규리

그림 / 서 순 태 ​ ​ ​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 이규리 ​ 공원 안에 있는 살구나무는 밤마다 흠씬 두들겨맞는다 이튿날 가보면 어린 가지들이 이리저리 부러져 있고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가 깨진 채 떨어져 있다 새파란 살구는 매실과 매우 흡사해 으슥한 밤에 나무를 때리는 사람이 많다 ​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것이다 키 큰 내가 붙어 다닐 때 죽자고 싫다던 언니는 그때 이미 두들겨맞은 게 아닐까 키가 그를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평생 언니를 때린 건 아닐까 ​ 살구나무가 언니처럼 무슨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매실나무도 제 딴에 이유를 따로 남기지 않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도 서로 아프고 서로 미안해서, 가까운 것들을 나중에 어느 먼 곳에서 만나면 미운 정 고운 정,..

봄의 시인 / 이 어 령

그림 : 영 희 ​ ​ ​ 봄의 시인 / 이 어 령 ​ 꽃은 평화가 아니다. 저항이다. 빛깔을 갖는다는 것, 눈 덮인 땅에서 빛깔을 갖는다는 것 그건 평회가 아니라 투쟁이다. ​ 검은 연기 속에서도 향기를 내뿜는 것은 생명의 시위. 부지런한 뿌리의 노동 속에서 쟁취한 땀의 보수. ​ 벌과 나비를 위해서가 아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가 아니다. 꽃은 오직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서 색채와 향기를 준비한다. 오직 그럴 때만 정말 꽃은 꽃답게 핀다. ​ 꽃은 열매처럼 먹거나 결코 씨앗처럼 뿌려 수확을 얻지는 못한다. 다만 바라보기 위해서 냄새를 맡기 위해서 우리 앞에 존재한다. ​ 그래서 봄이 아니라도 마음이나 머리의 빈자리 위에 문득 꽃은 핀다. ​ 시인의 은유로 존재하는 꽂은 미소하고 있는 게 아니다 가끔 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