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수국 6

수국 편지 / 이 효

그림 / 이 효 ​ ​ ​ ​ 수국 편지 / 이 효​ ​ ​ 마당 한편 아침을 베어 물고 아버지 유서처럼 정원에 한가득 핀 수국 ​ 직립의 슬픔과 마주한 자식들 엄니 업고 절벽의 빗소리 젖은 꽃잎 떨어지는 소리마다 짙어지는 어둠의 경계 ​ 혀바닥 마르고 주머니 속 무게 마른 나뭇잎 같아도 샘물 퍼주며 살아라 ​ 바람에 날리는 수국 편지 맑다 ​ ​ ​ ​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 ​ ​ ​ ​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그림 / 최신애 ​ ​ ​ ​ ​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 ​ ​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 봐요 ​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어머니는 수국화였다 / 권 정 일

그림 / 이 효 어머니는 수국화였다 / 권 정 일 ​ 그때 나는 세모시 저고리에서 달빛보다 더 선연한 바늘의 등뼈가 휘어지는 것을 보았다. ​ ​ 열 손가락 관절이 삐걱이는 소리를 들었다. 수묵화처럼 가지런한 이마가 환한 빛을 내던 토방 쪽마루를 보았다. ​ ​ 어머니 반짇고리 곁에는 내가 이름 지어준 별들이 내려와 집을 짓곤 했다. ​ 못에 찔려 피 흘리던 내 꿈들 우리집 추녀 끝에 밤마다 찾아드는 바닷소리를 들었다. ​ ​ 한 채 섬이 된 우리집 마당으로 물방울처럼 별 하나 별 둘 똑똑 떨어지는 기척이 있었다. 옛날 이야기가 섬이 되어 떠다니고 ​ ​ ​ 푸른 슬레트 지붕이 녹스는 소리마저 정겨운 여름밤이었다. ​ 흑싸리 화투패 같은 빈 껍질의 어머니 가슴에서도 녹스는 소리가 들렸다. ​ 어쩜 그것은..

가을이 오면 / 이 효

그림 / 권 현 숙​ ​ ​ ​ 가을이 오면 / 이 효 ​ ​ ​ 수국 꽃잎 곱게 말려서 마음과 마음 사이에 넣었더니 가을이 왔습니다 ​ 뜨거운 여름 태양을 바다에 흔들어 빨았더니 가을이 왔습니다 ​ 봄에 피는 꽃보다 붉은 나뭇잎들 마음을 흔드는 것은 당신 닮은 먼 산이 가을로 온 까닭입니다 ​ 멀리서 반백의 종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올 때면 무릎 꿇고 겸손하게 가을을 마중 나갑니다 ​ ​ ​ ​ 신문예 109호 수록 (가을에 관한 시)​ ​ ​ ​

수국 / 이 효

그림 / 이 효 ​ ​ ​ ​ 수국 / 이 효 ​ 마음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을 지운다는 것은 회오리바람 화병에 달덩이만한 수국을 손으로 뭉개면서 알게 되었다 ​ 지우면 지울수록 내면에서 올라오는 짙은 색들 꺼내놓으면 감당할 수 없을까 봐 세월로 눌러 놓았던 아픈 흔적들 ​ 마음에서 피어오르는 얼굴 항아리안에서 더욱 익어가는 그리움 세월이 가면 더 환해지는 수국 하루 종일 마음에 모진 붓질을 한다 ​

늦은 오후에 / 이 효

그림 : 김 정 수 ​ ​ 늦은 오후에 / 이 효 ​ 수국의 환한 미소를 꺾어 유리잔에 꽂아 놓았다 내 사랑을 저울에 올려보니 눈금이 울고 있다 ​ 마음에 이름을 담아 너를 안아보았지만 은빛 물결처럼 얇은 내 마음 투명 유리잔에 비친다 ​ 창틈으로 들어오는 빛 붉은 수국은 몸을 기댄다 미소를 꺾어버린 나는 종일 네 그림자 곁을 맴돈다 ​ 환한 미소는 초록 날개를 달아줄 때 더욱 곱게 피어오른다는 것을 너무 늦은 오후에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