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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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자연 / 이근배

그림 / 소순희 겨울 자연 / 이근배 나의 자정에도 너는 깨어서 운다 산은 이제 들처럼 낮아지고 들은 끝없는 눈발 속을 헤맨다 나의 풀과 나무는 어디 갔느냐 해체되지 않은 영원 떠다니는 꿈은 어디에 살아서 나의 자정을 부르느냐 따순 피로 돌던 사랑 하나가 광막한 자연이 되기까지는 자연이 되어 나를 부르기까지는 너의 무광의 죽음 구름이거나 그 이전의 쓸쓸한 유폐 허나 세상을 깨우고 있는 꿈속에서도 들리는 저 소리는 산이 산이 아닌, 들이 들이 아닌 모두가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쁨 같은 울음이 달려드는 것이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역임 *경향, 서울, 조선, 동아, 한국일보 신춘문예 5관왕 *시집 외

俗離山에서 / 나희덕

그림 / 안승완 俗離山에서 / 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시집 / 그곳이 멀지 않다

카테고리 없음 2022.07.04

장미역 4번 출구

그림 : 김 정 수 장미 역 4번 출구 / 이 효 울음이 검은 잎 뒤로 숨을 때 친구의 붉은 장미꽃 한 바구니 정오 같은 미소로 겹겹이 내게로 왔다 지난밤 꿈에서 길을 잃은 내게 장미의 환한 미소는 하늘처럼 열렸다 가랑잎 한 장처럼 떨고 있는 내게 장미 꽃잎으로 징검다리 놓아 주었다 세상이 마지막 남은 사랑을 빼앗아가 절망 가운데 무너질 때 장미꽃은 별처럼 나를 위로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공포가 절벽처럼 크게 느껴질 때 눈에서는 붉은 눈물도 마르더라 내 무너지는 마음을 가시로 찔러 주었지 정신 차리라 했다 모질게 살라 했다 친구는 내게 장미 역 4번 출구를 열어주었다.